공민왕의 최측근 조일신, 여기저기 영향력 행사
고려 공민왕한테는 몽골 체류 시절부터 데리고 다닌 비서가 있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 비서는 몽골에서 공민왕의 시중을 들며 신임을 얻었다. 그런 이유로 공민왕이 왕이 된 뒤, 그의 어깨에는 힘이 빵빵하게 들어갔다. 그한테는 직함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직함에 관계없이 여기저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인물이 지금의 대한민국 청와대에 들어가 수석비서관 같은 자리를 받았다면, 아마 직책에 관계없이 온 사방에 영향력도 행사하고 직권도 남용하고 부정축재도 저질렀을 것이다. 한때 공민왕의 최측근 실세였던 그의 이름은 조일신이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조일신의 이름이 나온다.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란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 나오는 일신(日新)은 조일신의 '일신'과 같은 글자다. 이 구절에서 <대학>은 우(又)를 강조했다. 나날이 새롭게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좀더 분발하여 훨씬 더 새롭게 되라는 의미에서 又자를 삽입한 것이다. 조일신은 그런 좋은 이름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조일신의 행적은 그 좋은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공민왕과의 친분을 내세우며 정부의 인사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청탁이 그에게 들어왔다. 공민왕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일신 본인이 공민왕 앞에서 그런 것까지 과시했기 때문이다. <고려사> 조일신 열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인사 청탁을 받았다면서 공민왕한테 너스레를 떨었다.
조일신은 상당한 재력가였다. 조일신 열전에서는 "(그가) 많은 친척과 문객들로 당파를 만들고 수하들을 모아 빈번히 연회를 베풀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 사조직을 만들고 파티를 자주 베풀었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재력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인사청탁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재물도 그를 재력가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렇게 인사문제에 개입하고 사조직을 늘리고 재력을 과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일신은 공민왕 취임 직후 단번에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이 때문에 공민왕이 한동안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정도다. 조일신 열전에서는 그가 국권을 잡고 횡포를 부렸다고 말했다.
그의 횡포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그가 공민왕의 개혁까지 훼방하려 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공민왕이 취임 직후에 추진한 개혁조치 중 하나는 인사권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종래에는 무신정권 때 세워진 정방이란 기구를 통해 인사권이 통일적이고 간편하게 집행됐다. 공민왕은 정방을 폐지하고 인사권을 여러 부서에 분산시켜 상호 견제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 조치는 조일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인사문제에 개입하기를 원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인사권을 분산시켜 자신의 개입을 어렵게 만드는 공민왕의 조치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공민왕을 찾아가 '이렇게 하시면 제가 개입하기 힘듭니다'라는 취지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조일신 열전에 따르면, 조일신이 그렇게 건방진 말을 하는데도 공민왕은 꼼짝도 못했다. 그저 그를 달래기에만 바빴다. 자네가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특별히 신경을 쓸 테니 이번 건만큼은 내 의견대로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만 봐도 조일신이 공민왕 정권의 핵심 실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 입장에서는 조일신한테 신세진 것도 있지만, 그가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몽골에서부터 보좌했기 때문에 공민왕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민왕으로서는 더욱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탄핵하자는 사람들, 콧방귀를 낀 조일신
그런 조일신에 대해 세상이 불만을 품었다. 왕도 아닌 인물이 왕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직권도 남용하고 비리도 저지르고 부정축재도 저지르니, 세상 사람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를 탄핵하자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조일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비판에 대해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공민왕은 즉위 초만 해도 그를 처벌하기 힘들었다. 좀전에 소개한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일신을 처벌하라는 목소리는 끊임 없었지만, 조일신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일신은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정기관에서 자신의 불법행위를 탄핵하자, 그는 자기 잘못을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사정기관의 조사 요구에 불응할 뿐만 아니라 '담당자가 누군지 만나보고 싶다'는 식의 태도까지 보였을 정도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사건을 유야무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뿐 아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감찰관들이 조일신의 죄를 규탄했다. 이들이 공권력을 동원해 그를 코너로 몰려고 하자, 조일신 역시 공권력을 동원해서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조일신 열전에 따르면, 조일신은 국법 집행을 방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감찰관들에게 죄를 씌우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고 미워했다"고 조일신 열전은 말한다.
조일신이 공권력을 조롱하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뻔뻔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민왕의 무능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공민왕은 큰 뜻을 품은 개혁군주였지만, 집권 초기만 해도 조일신 같은 비리 측근한테 휘둘리는 무능한 군주였다. 그래서 세상의 분노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리 측근을 사법 당국에 내주지 못했던 것이다.
비리 측근을 옹호한 대가로 공민왕은 결국 대가를 치렀다. 아니, 치러야 했다. 대가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조일신의 쿠데타였다. 세상 모르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던 조일신은 급기야 '성역'까지 건드렸다. 공민왕을 상대로 쿠데타까지 감행한 것이다.
<대학>에 대한 주자의 해설에 따르면, 은나라 시조인 탕왕은 '일일신 우일신'이 포함된 문장을 자기 욕조에 새겨두고 매일 같이 마음의 때를 씻어냈다고 한다. 탕왕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나날이 새롭게 했다.
조일신도 나날이 새로워졌다. 그의 나날이 새로워짐은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이었다. 직권남용과 비리가 나날이 새로워지더니 결국에는 자기 주군한테까지 반기를 드는 지경으로 발전한 것이다.
쿠데타 성공 직후에 조일신이 벌인 행위 중 하나가 조일신 열전에 소개돼 있다. 정권을 잡은 그는 독단적으로 인사 명령서를 작성한 뒤, 공민왕의 직인(어보·어새)을 빼앗아 마음대로 찍어버렸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 장군은 자신의 쿠데타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해줄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법적 압박을 가하고 하극상을 범했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손으로 재가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조일신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공민왕한테 재가를 강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직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조일신을 비호해준 대가로 공민왕은 그런 치욕까지 당해야 했다.
조일신의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데타 뒤에 그는 권력 분산을 우려해 쿠데타 동지들을 직접 숙청해버렸다. 이 때문에 조일신의 조직력이 약해지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민왕이 반격을 가했다. 조일신은 그렇게 해서 겨우 제거되었다. 권력과 부패의 극대화를 꿈꾼 조일신의 탐욕이 스스로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처음에 조일신의 비리문제가 불거졌을 때, 공민왕이 그를 신속하게 사법 당국에 내주었다면 공민왕의 체면 손상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비리 측근을 처벌하지 못하고 방치한 결과로 쿠데타까지 당하는 욕을 보았으니, 공민왕 입장에서는 조일신을 제거한 일이 별로 자랑스러울 수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조일신을 없앤 것은 다행이지만, 그로 인해 공민왕도 적지 않은 체면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이 겨우 수습된 때가 공민왕 취임 이듬해인 1352년이다.
조일신이 사라진 뒤에야 공민왕은 제대로 된 개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민왕의 위대한 개혁들은 조일신이 제거된 뒤에 나온 것들이다. 조일신이라는 허물을 벗어던진 뒤에야 진정한 개혁군주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군주가 아무리 훌륭하고 유능하더라도, 조일신 같은 비리 측근을 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취임 직후 한동안 조일신한테 휘둘린 공민왕은 그 점을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몸으로 체득했기에, 조일신 제거 뒤에 개혁군주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