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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5일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에서 창작뮤지컬 '빨래'를 관람했다. 2년 전에 봤던 뮤지컬이지만 여전히 흥겨웠고 감동적이었다. 인터미션 시간에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으니 티켓 비용이 적지 않은데도 재관람하러 온 관객이 꽤 많았다.

'빨래'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서울 달동네로 이사 온 '나영'은 빨래를 널러 올라간 옥상에서 이웃집 몽골 청년 '솔롱고'를 만난다. 어색한 첫 인사 후 바람에 날려 넘어간 빨래로 인해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어느 날 나영은 동료 언니를 부당하게 해고하려는 사장의 횡포에 맞서다 자신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빨래'에는 이주노동자와 임금체불 문제, 장애인 등이 등장한다.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와 친숙한 우리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공연이 시작되자 슈퍼마켓 주인 역할을 맞은 배우가 연극인 듯 연극 아닌 듯 '핸드폰을 꺼두라'는 당부와 함께 너스레를 떤다. 구수한 외모에 더 구수한 입담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슈퍼마켓 주인 역의 배우 이서환(44)씨를 공연이 끝나고 만나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며칠 후인 지난 12일, 부평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관객 50만 돌파한 뮤지컬 빨래, 일본에 이어 중국서도 공연
   
 이서환 뮤지컬 배우.
이서환 뮤지컬 배우. ⓒ 김영숙
올해로 11년째 공연하고 있는 창작뮤지컬 '빨래'는 지난해까지 3000회 공연에 관객 50만명을 돌파했다.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 200여개가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즈음 '빨래'는 평일에도 거의 만석이다.

'빨래'의 시작은 소박했다. 연출가 추민주가 지하 단칸방에 세 들어 살 때 옥상에 빨래를 널다 이웃집 옥상의 방글라데시 청년을 만난 게 모티브가 됐다. 추민주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들과 2003년 졸업 작품으로 이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고, 이를 인정받아 2005년 국립극장에서 상업 작품으로 초연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유료 관객이 스무 명 남짓이었다. 2008년 세 번째 공연을 하면서 관객이 많아졌고, 곧바로 앙코르 공연에 들어갔다.

11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사상과 극본상을, 4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극본상·작사작곡상·최우수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에는 대교출판 중학교 국어 교과서와 창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빨래' 대본이 실리기도 했다. '빨래'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서울살이를 다룬 추석 특집 뮤지컬 다큐멘터리 '서울의 달밤'이 <KBS>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가수이자 배우인 임창정이 이 공연을 보고 작품이 좋다고 노 개런티로 출연해 화제가 됐다. 같은 해 남자 주인공인 솔롱고 역에 뮤지컬 배우 홍광호가 출연을 자청했고, 배우 김희원이 예술감독이자 투자자로 함께 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일본에서 세탁(洗濯 せんたく)으로 번역하는 대신 파루레(パルレ)로 제목과 무대·미술·의상까지 원작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 공연했다. 올해 1월에는 중국에서 초청공연을 해 호평 받았다.

무대에서는 누가 더 거짓말을 잘 하느냐가 관건

배우 이서환은 2008년 오디션을 보고 '빨래'에 합류해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이씨는 극 중 제일서점 사장과 슈퍼마켓 주인, 조씨와 일용직 노동자 등 1인 4역으로 출연한다. 슈퍼마켓 주인이 매번 공연의 오프닝을 맡는다. 코믹한 연기가 천연덕스러워 본인의 성격이냐고 묻자, 원래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란다.

"무대에서는 누가 더 거짓말을 잘 하느냐가 관건인 거 같아요. 무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죠. 일상생활에서는 낯을 많이 가립니다."

'무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는 말이 멋있게 들려 구체적인 얘기를 요구했더니, 자신의 연기철학이란다.

"연기자의 평소 모습이 무대에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40대가 70대 할머니 역할을 하는데 어떻게 연기자의 진짜 모습이겠어요? 그 역할에 맞게 거짓말을 해내는 거죠. 관객들에게 들키지 않게 노력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진짜로 거짓말을 제대로 할 수 있고 그 역할을 할 수 있죠. 그게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관객으로 본 '빨래'에 대해 수다를 떨다가 재관람률이 높고 평일에도 좌석이 꽉 차는 비결을 물었다.

"우리 작품은 누군가와 같이 볼 수 있는 게 장점입니다. 혼자 또는 친구나 연인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작품은 많지만 가족과 같이 보는 작품은 거의 없잖아요. 빨래는 가족들한테 권하거나 같이 보러오는 경우가 많고, 다시 보러 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도 제 역할을 다른 사람이 할 때 7~8번 정도 봤어요. 제가 서점 사장 역할을 하면서 주인공 '나영이'를 괴롭혀야 하는데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해버리면 제 역할을 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하지만 저도 힐링이 필요해 공연을 본 적이 있어요(웃음)."

창작뮤지컬 '빨래'의 홍보물에는 '힐링 뮤지컬'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지금 당신에게 찾아온 가장 따뜻한 위로'라는 문구가 있다.

"마지막 부분에 등장인물 세 명이 빨래를 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상황을 풀어나가는 게 억지스럽지 않아서 공감을 많이 하는 거 같아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왜 힐링이냐고 물을 수도 있잖아요? 무대는 판타지니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면 현실로 돌아와서 허탈해질 수 있죠. 우리 공연은 아무 대책이 없는 대책을 내놓긴 하지만, 중학생부터 부모세대까지 같이 웃고 울고 시원하게 마음을 나누는 게 큰 매력인 거 같아요. 현실이 달라지진 않지만 뮤지컬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 또 보러 옵니다."

로망이었던 대학로를 서성이다 뮤지컬 배우로 거듭 나
   
 창작뮤지컬 '빨래'에서 이서환씨는 슈퍼주인으로 등장해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창작뮤지컬 '빨래'에서 이서환씨는 슈퍼주인으로 등장해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 김영숙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교를 인천에서 다닌 이씨는 1992년 인천대학교 독어독문과에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이 시켜서 부른 노래를 들은 한 선배의 권유로 노래패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씨는 교사가 되고 싶어 교직을 이수했지만 교생실습을 하고서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는 꿈이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독문과를 졸업한 그는 다시 신학대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무턱대고 갔다가 실패하기 싫어서 답사한다는 생각으로 3개월간 독일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고민이 생긴 거죠. '한번 사는 인생인데 원하는 걸 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뭐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이 서른에 음악신학대에 입학했어요."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가수를 하고 싶었단다. 그러나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내치듯이 학교를 졸업하니 막막했다. 정처 없이 쏘다니다 보니 도착한 곳이 대학로였다. 어릴 때 로망이었던 곳에서 연극포스터를 보면서 청소라도 시키면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세월의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은 나이 32세 때였다. 뮤지컬 '노틀담의 곱추' 공개오디션 공고 포스터를 보면서 '떨어진다고 실망할 게 없다'는 생각으로 응모했고, 합격했다.

"무대 맛을 느꼈어요. '유레카'라고 소리를 질렀죠. 제가 하고 싶은 걸 찾았으니까요."

그러나 그 후 오디션을 서른 번 정도 봤지만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왜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대본 습작을 하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이씨의 대본을 본 어떤 연기자로부터 '무대를 너무 모른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이씨가 쓴 대본 하나가 백제예술대 학생들에 의해 무대에 올라갈 일이 생겼다. 2005년에 무대에 오른 뮤지컬 '네버엔딩스토리'였다. 이씨는 오디션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때 자신이 수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유를 찾았다.

"작품이나 캐릭터 분석을 치밀하게 해야 하는데 노래를 좀 한다는 자만심이 컸던 거 같아요. 제가 덩치에 비해 목소리 톤이 높은데 당시 몸무게가 90kg이었거든요. 살을 빼고 외모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만난 작품이 2006년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였고, 2008년 '빨래'였습니다."

11년간 장기공연을 하고 있는 '빨래'에 이씨는 6년 정도 고정 출연했다. 오랫동안 하면서 긴장감이 떨어져 실수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실수를 하지 않는단다.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빨래'는 앞으로 10년은 더 무대에 오를 겁니다. 내용이 '올드'하다고 하지만, 이 작품이 롱런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는 거죠. '지하철1호선'은 15년 하다가 진부하다고 막을 내렸지만요."

연기란, 살아가기 위한 밸런스
   
 동원 양반김 CF의 한 장면. 오른쪽이 이서환씨다
동원 양반김 CF의 한 장면. 오른쪽이 이서환씨다 ⓒ 김영숙

2013년, 다시 어려움이 찾아왔다. 원 캐스트(=한 배역에 배우 한 명) 작품이나 장기공연 작품을 한동안 하지 않았다. 방송이나 영화 등,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200여 군데를 찾아다녔지만 예전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2년 정도 고생했고, 요즘 조금씩 열매가 맺히고 있단다.

최근에는 <SBS> 월화 드라마인 '닥터스' 1·2회에 출연했고, 9월에 방영될 <KBS>의 드라마스페셜 '한여름의 꿈'의 촬영을 마친 상태다. 내년 초에 개봉할 영화 '특별시민'에도 캐스팅돼 최근에 촬영을 끝냈다. '특별시민'에는 최민식, 곽도원, 문소리 등이 출연한다.

"앞으로는 방송 쪽의 일을 하고 싶어요. 영화는 긴 호흡으로 깊이 있는 연기가 나올 수 있게 촬영하는데, 저한테는 방송에서 하는 빠른 속도의 촬영이 맞아요. 대본도 하나 써놓은 게 있는데 재밌고 잘 썼어요. 투자자를 찾고 있습니다. 나에게 연기란, 내가 살아가기 위한 밸런스라고 생각해요. 무대에 서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풀려요. 배우들은 연기를 안 하면 불안해요. 저는 살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무대에서 풀기 때문에 술도 잘 안 마셔요. 연기와 일상 중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의미가 없어요. 연기를 하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사라지면 진짜 살고 있는 이 공간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이서환#뮤지컬 배우#창작뮤지컬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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