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저씨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짧은 치마 입지 말라며 '친절'하게 훈수 두는 친척 오빠, 상대의 기분 따윈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상한 농담을 던지는 직장 상사, 처음 보는 이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시전하는 택시 기사까지.
무궁무진한 무례와 무리수의 세계를, 그동안 그냥 눈감아줬다. 아니, 눈감을 수밖에 없었다. 규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제제기하기엔, 이들은 너무 '보통'의 사람들. 무례가 쉽게 용인되는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간 '예민한'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다. 참고 넘기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 그래서 이 '문제적' 사람들은 가시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개저씨'란 단어가 등장했다.
"... 개저씨는 '신조어'일 뿐이지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뜻하지 않는다. 개저씨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과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 이 용어들은 주로 약자를 향한 강자들의 낙인이다. 하지만 개저씨는 정반대다. 오랫동안 짓눌린 자들의 미세한 저항이 모이고 모인 이유 있는 반항이다. 지금껏 이들은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의 부당함을 인지했고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으로 수군거리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떻게든 피드백하는 용기를 보였다. 이 정도면 혁명적이지 않은가?" -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96쪽
인터넷에는 자신이 개저씨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개저씨 체크리스트'가 떠돌고, 유명 개그 프로그램에서마저 개저씨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콩트(<개그콘서트>의 '게놈 프로젝트', '아재씨' 등)를 한다. 아주 약간, 세상이 변했다. 그래도 갈 길은 멀다. 성별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타인에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대체,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개저씨에 익숙한 우리 사회는, 이제야 이 물음을 던진 것뿐이다. 남은 과제는 치열하고 끈질기게 논의를 이어가는 것. 한 남자가 말을 보탰다. 사회학 연구자 오찬호씨다.
오씨는 지난 7월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라는 책을 냈다.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란다. 그 남자엔 본인도 포함될 터. 시작부터 "20대 중반까지 '착하고 말 잘 듣는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공공연히 밝히고 다닐 정도"로 "지독히도 보수적"이었다고 고백하는 그가 보기에도 이상한 한국 남자를 '군대', '의리', '가오' 등의 키워드로 파헤친다.
사실, 책 내용은 그리 새롭지 않다. 저자 본인이 인정하듯, 여성학 개론서 정도의 내용을 담았다. 이미 많이 나온 이야기란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낸 이유는 뭘까. 한국 사회는, 이 '뻔한' 설명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마주했다.
- 책 제목이 좀 도발적이다. 이런 평, 많이 듣지 않나.
"여자 기자를 만나면 다 책 제목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인터뷰 하려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책 제목 때문에 공격을 받을까 봐) 지하철이나 이런 데선 못 읽겠더라면서. 우리 사회가 남자 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은 같은 남성을 공격하는 게 아니고 비판하는 거다. 솔직히 나는 같은 남자니까, 그 공포가 크지 않다. 책 제목이 세다는 평이 굉장히 한국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성평등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강한 남성으로 사회화되는 과정에 대해 비판적인 책이다. 그런데 이런 책을 (남성들이) 공격적으로 느낀다는 거 자체가, 저한테는 굉장히 사회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 개저씨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재밌었다. 그런데 '한남'(한국 남자)라는 단어도 있지 않나. 한국 남자는 다 그래, 라는 의미를 담은."개저씨는 남자이기에 여자에게 부당하게 해도 된다는 시선을 인식한, 좀 더 확장된 의미를 담은 단어다. 한남은 미러링적 관점에서 나온 단어라고 본다. 지금까지 어떤 여자가 잘못했을 때 '김 여사'라든가 '역시 여자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나. 그걸 미러링한 거다. '역시 한국 남자들은 안 돼'라고.
그런데 개저씨는 '아무리 당신이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성평등의 관점에서 당신을 비판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단어다. 그런 의미에서 한남보다 개저씨가 더 자각적인 단어라고 봤다. 일상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을 더 들이댄 결과라고 본다. 노력이다. 친숙한 것을 부당하다고 깨우치는 게 공부를 하는 이유이지 않나. 그렇기에 개저씨는 혁명의 단어다."
- 책에서 '마초남'이었다고 고백한다. 과거형이긴 하지만, 그랬던 사람이 이런 글을 쓰기 쉽지 않을 텐데."화가 나니까 쓰는 거다. 세상이 정상이라면... 이런 글 쓰지 않겠지. 보통 강연에 가면 '언행불일치에 발목 잡히지 말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볼 때는, 수준이 낮을 수 있다. 성평등 관념이 명확히 잡힌 사람만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나는 내 아내와 아이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성차별을 지양하고자 하는 사람의 첫 번째 걸음으로 실천을 할 수도 있겠지만, 반성하는 것도 길이다."
- 남성성은, 공고하면서도 위태로운 것 같다. '군대'와 같은 남성성이 강한 집단을 늘 그리워하면서, '남자로 살기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모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본인 스스로 군 생활을 반추하면서 그걸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유를 뺏겼기 때문에 느낀 소소한 기쁨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다. 군 비리라든가 폭행 사건들을 보면,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지 특별한 의지가 있어서 살아난 것은 아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것을 총체적으로 보면 다 아는데... 그래서 편안하게 술 마실 때는 군대 욕을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뭐 같은 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하나의 장점이 된다. 그게 상품성이 있는 거다. 그러니 끝없이 포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모순들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 군 생활이 군 생활로 끝나지 않는 건, 이 경험 덕에 인생의 호출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병영 캠프 같은 데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다. '더 빨리 적응해야 한다', '내가 강해져야 한다'. 정말 뭐 같은 곳인데 좋다고 하고, 그런 억울함을 여성들에게 돌리고."
-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남성에 대한 공격, 위기로 해석하는 이들도 많다."모든 문제를 남녀 이분법적 구도로 해석하는 것, 너무 바보 같은 짓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군 가산점제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게 남성에 대한 공격인가? 개인적으로 군 가산점제 논쟁이 불거졌을 때 그 문제를 처음 알았다. 문제를 인식하고 '그럼 군대에 가지 못하는 남성을 차별할 수 있는 군 가산점제를 폐지하고, 남성 집단의 억울함을 풀어줄 방법이 뭐가 있을까'란 질문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감히 여자가...'라는 반응이 나오니... 수학에서 '집합'을 맨 처음 배우고, 그다음의 개념이 이어지지 않나. 우리는 이렇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사회 탐구 훈련이 없었다. 그러니까 맨날 초보적인 수준의 논의가 이어지는 것이다."
- 지난 5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터지자 '나는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얼마 전 한 성우의 메갈리아 티셔츠 인증 사건이 터지고 웹툰 작가들의 지지선언이 이어지자 웹툰을 규제해야 한다는 예스컷 운동이 일기도 했다."힘 빠진다. 글을 쓰면 여전히 댓글 달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댓글을 보면, 책을 보고 나서 해야 할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남자 고생한 건 뭔데', '남자 힘든 거에 관해선 왜 말 안 하냐', '여자들도 군대 다녀와라'고 말한다. 질문은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한 포털사이트에 '오찬호' 치면 '오찬호 군대'가 연관검색어로 붙는다. 한 매체에 페미니즘 관련 글을 쓴 게 8년이 지났는데 여전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질문이 똑같다.
메갈 티셔츠 인증 사건도 그렇다. '메갈이 남성 혐오 집단인데, 그들을 후원하는 셔츠를 샀다'는 논리다. 일종의 역미러링이다. '너는 혐오 집단이니,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건데... 그 전제에 동의할 수 없다. 과연 메갈이 일베인가. 메갈이 보여주는 것이 일베의 여혐과 같은 것인가. 백번 양보해도 같은 게 아니다. 여성들은 여성 혐오를 그냥 문화라고 느낀다. 하지만 메갈이 보여주는 것은 남자들에게 문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남성들이 피부로 느끼는 공포가 없다. 그 차이가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냥 메갈이 싫은 거다.
메갈이 옳고 그르다는 걸 따지자는 게 아니다. 메갈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이상하다. 커뮤니티에 '페미니즘 고수'만 들어오나? 전국 팔도 사람들 다 들어온다. 맥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결국은 메갈에 대한 사상 검증이다. 이런 식의 비난이 가해지면서, 오히려 여성 혐오에 맞설 수 있는 작은 지점도 잃을 수 있다."
- 그렇다고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줄지 않는다. 저항이 더욱 거세지는 느낌인데."전투가 논리적으로 흘러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페미니즘 도서 시장의 크기가 이를 증명해준다. 말 그대로 '남자는 군대를 가지 말고 여자는 애를 낳지 말자', 그런 식의 논의가 아니다. 공부를 통해 '성평등은 남성의 권리를 뺏는 게 아니다, 우리가 배제되는 현실에 남성이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유의미한 변화이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엄청난 인기는 아니다. 페미니즘 책이 사회과학 서적 상위권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베스트셀러 수준은 아니다. 당장 30·40대, 부모님 세대만 해도 일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아직 담론이 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생각한다. 긍정적이지만 낙관할 분위기는 아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인종차별 끝났다고 말할 순 없지 않나. 불편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지. 성평등은 모두에게 좋은 거다. 오히려 남자에게 남는 장사다. 다크서클 안 생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