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가 사라진다. 글로벌 저성장 기조와 기술의 발달은 우리 모두를 일자리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평생직장의 시대는 오래 전 끝났고, 100세시대 누구나 2~3번의 일(業)을 해야 생존한다. 국가도 사회도 답해줄 수 없는 문제, 결국 개인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내 일은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다. 직장을 다니면서, 또는 홀로서기를 통해 '1인기업'을 운영해온 이들에게서 답을 찾고자 한다. '직장 다닌다고 직업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한 '1인기업가'들의 경험담을 통해 해법을 찾아본다. [편집자말] [편집자말] |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점수에 맞춰 대학을 선택했지만 전공만큼은 적성을 살리고 싶었다.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손으로 만드는 목공예나 프라모델 조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추억이 떠올랐다.
막연히 토목공학은 그런 일들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2학년까지는 그저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오려니 생각했지만 군 전역 후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의 적성이나 성향이 토목공학과는 아예 맞지 않다는 것을.
서울 동쪽 끝자락 풍납동에 위치한 낡은 아파트 상가 1층 20~23㎡ 크기의 작은 공간에서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자전거를 만드는 20대 청년이 있다. 3년째 수제자전거(Custom bike) 프레임을 제작 판매하는 이정훈(29) 루키바이크 대표다.
핸드메이드 매력에 푹 빠져 자전거 프레임빌더 되기로 결심"전공이 제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그때부터 진지하게 '뭘 할까'를 고민했어요. 취미로 자전거를 탔는데 자전거영화제에 갈 정도로 관심이 많았죠. 문득 자전거에 관련된 일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직장인이 되는 것보다 전문적인 기술을 갖고 있으면 평생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전거에 관련된 직업이 꽤 많았는데 그 중에서 커스텀 자전거 프레임을 제작하는 프레임빌더(frame builder)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자전거 관련 직업은 미케닉(mechanic), 피팅(fitting) 전문가, 프레임빌더, 그리고 판매까지 생각보다 다양했다. 이런 직업들은 사실 유럽,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지만 국내에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당장 국내에서 수제 자전거 제작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다. 2009년 당시 서울에 2명을 포함 전국에 4,5명 정도 있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자전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재밌어 보이기도 했고 핸드메이드라는 점이 저에겐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국내에서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도 계기가 됐고요. 빈티지, 레트로 풍이 다시 유행하는 것을 보고선 이걸 한 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런저런 준비를 시작했죠. 국내엔 자료가 별로 없어서 해외자료를 뒤져가면서 혼자 공부했어요.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할 때 자전거숍에서 일하며 자전거 정비도 배웠습니다."대학 3학년 한창 전공수업에 매진해야 할 때 이씨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아들이 멀쩡히 잘 다니던 대학을 졸업도 하지 않고 자전거 만드는 일을 하겠다니 부모님으로선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결사반대하던 부모님과 기나긴 갈등과 설득 끝에 졸업할 때까지 이씨가 학교를 다니는 조건으로 하고 싶은 일을 허락해주기로 합의했다.
"프레임빌더가 하는 일은 정확히는 자전거 프레임을 제작하는 일입니다. 개개인의 신체사이즈나 취향, 개성 등에 맞춰서 맞춤 자전거를 만드는 일입니다. 목표는 유럽의 이름 있는 브랜드처럼 국내에서 수제자전거라고 하면 루키바이크라는 브랜드가 떠오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프레임빌더 과정 6주 배운 후 6개월간 연습 또 연습처음에는 유럽이나 일본에 직접 가서 도제식으로 몇 년간 일을 배울 생각이었지만 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도제식 대신 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미국 시스템도 알아보았지만 체류비나 비행기값 등 부대비용이 학원비보다 서너 배는 더 들었다.
"때마침 국내에서 자전거 정비하는 분 중에서 프레임빌딩교육을 다녀오신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미국의 프레임빌딩 시스템으로 교육과정을 만들었는데 이것저것 따져봤을 때 굳이 비싼 비용을 들여 해외에 가는 것보다 국내에서 배우고 남는 돈으로 더 많은 재료를 사서 연습을 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얻었죠."자전거 프레임 제작은 누구나 배우면 할 수 있다. 6주의 교육과정 동안 목표는 스스로 자전거 프레임 한 대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교육 받으며 열심히 정리한 필기 내용과 인터넷 검색으로 스크랩 해놓은 자료들을 참조해가며 6개월간 연습 또 연습했다.
"3년 전 아무 생각 없이 덜컥 공방을 내고 개인사업자 등록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준비과정에서 대부분의 재료를 해외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해외 거래처를 찾는 것부터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이 분야에 컨설턴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모든 것들을 감당해야 했던 상황이 무척 힘들었는데 그때 경험들이 시스템이 되니까 지금은 좀 편해진 점도 있습니다."이씨의 수제자전거 프레임 제작 과정은 고객과의 상담으로 시작된다. 자전거를 어떤 용도로 탈건지,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타는지, 원하는 디자인 색상은 어떤 건지 최소 1시간 이상 충분히 이야기한 후 고객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한다. 재료 선택까지 마치면 프레임 설계에 들어가고 이후 설계도를 보고 고객과 다시 한 번 상담한다.
이미 자전거에 대해 잘 아는 고객들은 설계도를 보고 직접 수정요청을 하기도 한다. 설계도가 확정되면 재료를 구입해 재단하고 용접, 마무리작업 순으로 진행된다. 작업시간은 대당 열흘 정도, 60~70시간 가량 걸린다.
자전거 프레임 가격은 99만 원부터 형성되며 수요는 120만~160만 원선이 가장 많다. 자전거 종류마다 다르지만 도색까지 마친 자전거 완제품의 가격은 최소 300만 원에 시작해 평균 350만~500만 원선이 가장 많이 팔린다.
자전거 완제품을 제작하기도 하지만 이씨를 찾아오는 고객 절반 이상은 이씨가 프레임만 제작해 주면 부품을 직접 가지고 와서 조립해서 쓰는 경우다. 그만큼 이씨의 고객은 이미 자전거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는 특정다수인 셈이다.
제조 1인기업 3년차로서 이씨가 겪는 가장 힘든 점은 수제 자전거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국내 수제자전거시장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 소비자들의 경우 대당 300만 원 이상인 수제자전거 가격에 대한 이해 역시 아직 부족하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자전거는 신문을 구독하면 주는 경품, 또는 5만~10만 원 정도 주면 살 수 있는 물건이었죠. 타다가 고장 나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최근 들어 자전거 시장의 소비경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픽시' 같은 중고생들이 타는 자전거도 50만 원이 넘고 MTB용 자전거도 100만 원대가 훌쩍 넘어요. 일단 시장은 전보다 커진 것 같지만 국내 자전거 문화 자체가 달라진 건지는 아직 모르겠어요."5000억 자전거 시장 중 1%, '수제자전거 장인' 되고파이씨는 국내 자전거시장을 5000억~6000억원 정도로 본다면 그 중에서 커스텀 자전거시장은 1%도 안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애초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지만 수제 자전거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시장조차 형성되지 못한 국내 상황이 안타깝다.
"이 직업이 아직 우리나라에선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3년차이지만 수입이 매월 일정치 않고 들락날락하는 편이죠. 5년까지는 공방을 유지하고 버틸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손님 중에 가끔 제 프레임 가격이 비싸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자신만의 자전거 프레임을 갖는데 그리 높은 가격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에는 비싸다고 하시던 분들도 제가 작업하는 내용과 과정을 이해하시고 나면 가격도 이해하시더라고요."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은 이씨를 부러워한다. 회사의 소모품 같이 느껴진다는 그들은 상사 등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일에 대한 만족감이나 책임감을 느끼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씨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감이 크다. 한 가지 계획을 직접 세우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은 직장생활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정년이 따로 없고 생계만 유지된다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수제자전거가 좀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5년차까지는 현상유지만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장기적으로는 한국에서 수제자전거 하면 루키바이크가 떠오를 정도로 유명해지는 것이 목표입니다. 흔히 말하는 장인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10년 이상을 해야 장인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가 되면 제 자전거를 타시는 분들도 자부심을 가질 테고 제가 어디에 있든 해외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겠죠. 그렇게 되면 제주도나 조용한 섬에서 자전거만 만들며 사는 것이 바람입니다."
초기엔 주변에 창업을 적극 권했던 이씨는 3년 정도 겪어본 지금 다소 냉정해졌다. 국내 시장의 현실과 미래 상황이 녹록치 않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하겠다는 이들에겐 자전거를 좋아해야 하며 자기 작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업은 내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니 창업에 앞서 철저한 고민과 선행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절대 섣불리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젊으니까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경험상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