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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비 상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꽃과 나비.
자연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한다.
꽃과 나비상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꽃과 나비. 자연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한다. ⓒ 홍광석

과거 자연 마을엔 두레가 있어서 이웃끼리 농사를 도왔다고 하는데, 예순을 넘긴 나도 어릴적 두레를 본 적 없어, 이야기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농가의 울력과 품앗이는 젊은 시절에도 볼 수 있었던 전통이었다. 품앗이 순서나 못줄을 잡는 사람과 모를 심는 사람을 어떻게 정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모내기는 마을의 행사였다는 점, 그리고 못줄에 맞추어 모를 심던 사람들의 풍경은 눈에 선하다. 실제 나도 어른들 틈에서 모내기에 참여해본 적이 있어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울력은 마을 공동의 일을 보수 없이 함께 하는 행위다. 길이 포장되기 전인 1970년대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 앞을 지나는 신작로를 보수하는 일을 했다. 힘이 좋은 젊은이들은 바지게를 지고, 나이든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져 나른 돌을 패인 길에 다져서 넣는 일을 했다.

1970년대 초까지도 '지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정부가 퇴비 증산을 독려하고 마을 간에 경쟁을 부추겼다. 그때 퇴비증산도 마을의 큰일이라 울력이라는 공동의 노동을 통해 퇴비더미를 쌓기도 했다. 심지어 시골에서는 학교에서도 퇴비를 만든다고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 자리를 잡은 후, 개인 간 노동의 교류를 살폈더니 품앗이는 아예 찾을 수 없었다. 농업의 기계화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농촌도 많은 부분이 도시화되어 노동의 가치를 현금으로 환산하는 일당제가 고정됐기 때문이리라.

그간 우리도 잔디밭을 매거나 밭가는 일에 마을 사람들 손을 빌렸다. 그렇지만 일로서 일을 갚을 수 있는 품앗이는 상대방과 노동력이 비슷할 경우 가능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나의 일솜씨로는 품앗이를 제안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일당제가 낫다는 생각으로 마을의 관행을 따랐다. 하지만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풍습 하나가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마을의 울력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안길까지 포장되고, 퇴비는 농협에서 사오는 터라, 굳이 함께할 일이 적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또 농촌에도 도시의 개인주의가 전파되면서 공동체 일을 귀찮게 여기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촌의 노령화로 인해 자기 몸을 감당하기 어려운 노인들이 많아진 것도 울력을 강요할 수 없는 이유다. 거기에 요즘은 정부의 공공 취로 사업이 많아 굳이 마을 사람들이 전체가 나서서 보수할 일이나 기회도 많지 않다.

우리 마을은 1년에 두 번의 공동체 행사를 한다. 그 하나가 정월 대보름 당산제 행사이고, 다른 하나는 추석을 앞두고 마을 입구의 길가에 자란 풀을 베어내는 작업이다. 당산제는 남자들이 불 피워 돼지 다리를 삶고 여자들을 음식을 만들어 준비하는데 마을 공동체의 기원 행사이면서 울력의 전통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풍속이요 문화라고 본다.

마을진입로의 풀베기 울력 역시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진정한 협동이다. 마을을 찾는 귀향객이나 손님맞이 차원에서 일종의 환경정리를 하는 셈인데 이사 온 후로는 나 역시 빠지지 않고 있다.

금년에도 지난 9월 13일 새벽, 지방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포장된 도로가의 풀을 베는 울력이 있었다. 오전 6시부터 일을 한다기에 어둑한 5시에 일어나 예초기를 시험 작동하고 예초기를 지고 나갔더니 발 빠른 사람들은 벌써 일을 시작한 뒤였다. 1가구당 1명이 나오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실제로 보이는 사람은 절반도 채 안 되었다.

집만 사두고 주말에나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이장의 사전 예고 방송이 나갔음에도 못 들은 척 오지 않았다. 90을 넘기거나 언저리의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나 수술 후유증으로 걸음도 못 걷는 노인에게 빗자루라도 들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거기에 마을에 거주하는 남자는 열 명도 안 되는데 65세 이하의 남자는 딱 한명 뿐이다. 그러나 아직 현직 공무원이니 출근해야한다. 대신 그 부인이 낫을 들고 나왔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이 빠진 셈이다.

예초기를 지고 온 남자들은 나를 포함하여 5명이었는데 65세 이하는 없다. 80세 넘은 아저씨와 병중의 정씨를 비롯한 노인들(주로 할머니들)은 빗자루 혹은 낫을 들고 예초기가 어질러 놓은 풀들을 쓸어내거나, 나무를 휘감은 넝쿨 식물을 잘라낸다. 1km 이상의 거리를 예초기를 지고 왕복했더니 땀은 속옷을 적시고, 해는 이미 밝아 8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실상 남은 사람들에게 울력의 양이 많아진 셈이지만 누구 하나 불평이 없었다.

일을 끝내고 나니 마을 부녀 회장은 간단한 주류와 음료수 그리고 다과를 음료수와 빵을 펼쳐놓고 기다린다. 술 좋아하는 김씨는 아침부터 소주병을 들고 다닌다. 마을회관 앞에 앉아 땀을 식히며 농사를 걱정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이런 울력의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지속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구시대의 교육에 길들여진 사고라고 말하는 하는 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기 싫은 것들을 자체적으로 치우고 그런 후 한 잔의 음료수라도 나누면서 마을 사람들이나 객지에 나간 자식들의 소식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울력도 미풍양속이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울력이나 품앗이에 대해 일종의 향수를 가진 편에 속한다.
혼자 일을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일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덜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사라진 울력과 품앗이를 부활하자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주장이 먹혀들지 않을 세상임을 안다.

여럿이 하는 일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하고 일의 효율을 높인다고 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마을에 남아 있는 울력의 형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적절한 일감을 만들어 울력을 권장하고 그에 상응하는 마을의 발전 기금을 제공하는 것도 검토해 볼 일이 아닌가 한다.

16일엔 우연히 비오는 골목을 나갔다가 빗속에 아들과 며느리 딸들이 마늘을 심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들은 현직 전남 교육청의 사무관이다. 며느리도 며느리와 딸들도 학교 등 직장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빗속에 웬일이냐고 말을 건넸더니 추석에 고향집에 모인 형제들이 이 기회에 이미 기력을 잃은 어머니가 할 일을 해놓겠다는 대답이다. 보기 드문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런 남매들이 비옷을 입고 밭에 마늘을 심는 장면은 다시 울력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추석은 지나갔다. 고향을 찾았던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비 오는 마을은 고즈넉하다.  
비는 내일까지 온다고 한다. 비가 그치면 우리도 마늘을 심어야 할 것이다. 밭은 이미 만들었으니 심는 일은 아내가 주로 할 것이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의 울력은커녕 마을 품앗이 감도 안 되는 작은 텃밭이다. 비를 핑계로 바깥일을 포기하고, 평상에 앉아 종자 마늘을 쪼개는데 괜히 일을 함께할 사람이 그리워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 한겨레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울력 #품앗이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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