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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이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장례식장에 모인 많은 사람 중에서 대학생 문교창씨를 만났다. 문씨는 서강대 심리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아래는 백남기 농성장에서 활동 중인 문교창씨와 28일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소녀상 지킴이 거리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문교창씨를 비롯한 '평화나비' 대학생들이 28일 고 백남기 농민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소녀상 지킴이 거리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문교창씨를 비롯한 '평화나비' 대학생들이 28일 고 백남기 농민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 유문철

- 반갑습니다. 교창씨와 지난 1월 2일 백남기 농민 농성장에서 첫 인연을 맺었는데요. 그때 평화나비 대학생들 10명과 백남기 농성장에 오셨는데요. 새해 인사를 한다고 했었죠. 그때 일본군 '위안부' 한일협상과 소녀상 철거 문제로 소녀상 지킴이를 하고 계셨죠. 당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네. 2015년 12월 28일에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협상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평화나비를 비롯한 대학생들이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지킴이 거리 농성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2016년 1월 1일에 백남기 농성장 어르신들이 소녀상에 연대방문을 해주셨고요. 새해 인사를 드리려고 평화나비 친구들과 백남기 어르신 농성장에 찾아갔죠."

- 당시 말씀하시길, 문교창씨도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백남기 농민께서 물대포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예,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너무 화가 나요. 또 백남기 어르신께 너무 죄송해요. 제 할아버지나 마찬가지인 농민께서 그런 처참한 지경을 당하시는 걸 보고 너무 괴로웠어요. 제집이 전남 영암이에요. 농사를 짓는 집은 아니라서 농사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농촌을 주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거든요. 그래서 농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어요. 또 보성과 영암이 가까워요. 그러니 남의 일 같지 않고 제 할아버지가 당하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 전남 영암이면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잖아요. 시골 인근에서 나고 자랐다니 그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네요. 저와는 지난 1월 2일에 처음 만났지만 백남기 농민과는 지난해 11월 14일부터 인연을 맺으셨다고 했죠. 이웃 마을이니 더 애틋하시겠어요. 지난 1월 2일 이후로도 농성장을 종종 찾으셨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네, 맞아요. 제가 학생이라 개학을 하고 소녀상 지킴이 활동을 많이 못 했어요. 백남기 농성장에도 자주 찾아오지는 못했고, 늘 마음에 죄스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간을 내서 종종 농성장에 찾아뵙게 되었어요."

- 백남기 농성장에서는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라고 했고요. 문교창씨도 쾌유 기원문을 남겨 주셨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25일 문교창씨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이제 이 자리에서는 쾌유 기원이 아니라 조문을 드리고 경찰의 '시신 침탈'을 막기 위해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네, 참담하고 너무 화가 나요. 물대포에 돌아가신 것만 해도 억울한데 사인이 분명해 보이는데 부검을 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돼요. 이미 민중총궐기 때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부상을 당하셨잖아요.

그리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도 서울대병원의 사망진단서 문제와 경찰의 부검 영장이 부당하다고 밝혔고요. 그런데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 일어나니 이건 나라라고 할 수가 없어요. 국가권력이라는 것에 관해 정말 깊은 고민을 해요. 제가 심리학과에 재학 중인데요.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공부를 하다 보니 백남기 농민 사건을 바라보면서 '국가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깊은 고민을 하고 있어요."

"또래인 의경 보며 '나도 군대 가면 저렇게 해야 하나' 했다"

 백남기 30년 동지인 가톨릭동지회가 지난 1월 1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지키기 거리 농성중인 '평화나비' 대학생들을 방문했다.
백남기 30년 동지인 가톨릭동지회가 지난 1월 1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지키기 거리 농성중인 '평화나비' 대학생들을 방문했다. ⓒ 백남기대책위

- 장례식장에서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요. 오늘 처음 오신 건가요?
"아니오. 지난 24일 밤에 백남기 어르신이 위독하고 경찰이 중환자실에 진입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25일 다시 경찰 진입 소식을 듣고 밤에 서울대병원에 왔어요. 중환자실 주변에서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갔다가 26일에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달려왔죠. 그때가 오후 3시쯤인데 정문에 경찰이 잔뜩 서서 검문을 하는 거예요. 너무 황당했어요. 돌아가신 분을 조문하러 왔는데 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검문을 해요? 전 요령껏 들어오긴 했는데요. 경찰의 행동은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는 행위예요."

- 당시 중환자실에서 영안실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경찰과 대책위, 조문객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는데요.
"네. 저는 경찰병력이 백남기 어르신을 모시는 차량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막는 바깥 대열에 있었는데요. 밀고 밀치고 하느라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죠. 앞에 있는 경찰들이 의경들이고 다 제 또래였어요. 그 친구들을 보면서 안타까웠어요. 전 아직 군대에 가지 않았거든요. '나도 군대 가면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친구들이 나쁜 게 아니에요. 저녁에 촛불문화제를 할 때, 백남기 어르신을 애도하는 연설을 듣고 우는 의경도 보았어요. 그들은 결국 병역 복무 때문에 원치 않는 자리에 끌려와 원치 않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거죠."

-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교창씨는 민중총궐기 때부터 조문 첫날에도 현장에서 비극을 모두 겪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일선 경찰이 아니라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이 문제 아니겠어요?
"그렇죠.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제 눈앞에서 자꾸 일어나고 있어요. 백남기 어르신도 그렇고, 세월호도 그렇고, 그 외 국가권력이 국민을 대하는 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국가권력의 말기적 현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해도 해도 너무 하니까요."

- 네, 공감해요. 민중총궐기 집회라는 것이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못 살겠다' 하며 다 함께 모이는 자리였지요. 그 자리에서 백남기 농민께서 가장 크게 다치고 10개월이 지나 결국 돌아가셨어요. '백남기 농민 국가 폭력사건'이 교창씨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요?
"백남기 어르신은 농민으로서 그 대회에 오셨지요. 농업과 농민, 농촌의 문제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심각하다는 걸 이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난생처음 지난 여름에 농활을 다녀왔어요. 농활 가서 직접 농사를 해보고 농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심각함을 더욱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어요. 아직 학생이라 잘은 모르겠지만요. 농민들이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식량주권 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시급하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어요."

- 그럼 교창씨는 백남기 농민을 통해 농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으니 대학 마치고 영암으로 돌아가서 농사지을 생각을 했나요?
"그렇진 않아요. 아직은 배움의 초기이고 제가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백남기 농민의 사례를 통해 국가와 정치의 문제를 고민하는 중이에요. 백남기 어르신도 보성에서 서울도 대학에 와서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오래 하셨잖아요. 저도 현재는 정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더 있어요."

"백남기 농민의 삶 알면서 큰 배움 얻었다"

- 백남기 농민의 삶을 보면 지금 교창씨 나이부터 30대 초까지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지요.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짓고 농민 운동을 바탕으로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으로 나아가셨죠. 그런 의미를 담아 세 자녀 이름을 '민주화', '두산', '도라지'라고 지은 것이고요. 풀이하면 민주화를 이루어 백두산에 가서 도라지타령을 부르고 싶다는 건데요.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 농민 운동의 세 가지 뜻을 자녀 이름에 담고 후손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신 거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백남기 어르신의 삶을 알게 되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큰 배움을 얻었어요. 지금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지만 평화나비 소속으로 소녀상 지킴이 활동, 민중연합당 청년 자기정치 운동에 참여한 것도 어찌 보면 백남기 어르신의 삶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 아직 20대 초반이신데도 40대인 제가 부끄러워질 만큼 생각이 참 깊습니다. 앞으로 전남 영암 태생의 또 한 분의 백남기를 보게 될 것 같군요. 오늘(28일) 2차 부검영장 신청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면서 이곳 장례식장이 초긴장 상태인데요. 오늘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인터뷰는 영장 발부 이전에 진행됐다)
"지난 토요일(24일)부터 장례식장에 하루도 빼지 않고 오고 있는데요. 학교수업이 있어서 수업 마치고 와서 밤늦게까지 있다가 막차 타고 집에 가곤 했어요. 하지만 오늘은 좀 분위기가 심각하네요. 부검 영장 결과에 따라 행동하려고요. 나쁜 결과가 나오면 오늘은 집에 가기 힘들 것 같아요. 백남기 어르신 가시는 길을 지켜야 하니까요."

- 이 세상이 정의롭고 생각 바른 청년에게 많은 숙제를 내주네요. 소녀상 지킴이 해야지, 백남기 농민 지킴이 해야지, 수업 들어야지, 농활 다녀야지. 법원에서 부검 영장을 기각해서 교창씨가 집에 돌아가길 기원할게요.
"국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해요. 일단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해 봐야지요."

덧붙이는 글 | 유문철 시민기자는 충북 단양에서 아홉해째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필명 유기농민)과 단양한결농원 유기농 농사 이야기에도 본 기사가 실립니다.



#백남기#소녀상#부검 영장#농민 운동#서울대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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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단양한결농원 농민이자 한결이를 키우고 있는 아이 아빠입니다. 농사와 아이 키우기를 늘 한결같이 하고 있어요. 시골 작은학교와 시골마을 살리기, 생명농업, 생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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