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의 국가기관들이 정의와 공의에 대한 확고한 원칙과 기준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기관들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국가시스템을 운용해 나갈 때 비로소 국민들이 국가기관을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탓이다.
그런 면에서 공정성은 국가기관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공정성이 무너지면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 불신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국가시스템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 불신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각종 지표와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나듯이 국회, 정부기관, 사법부, 검찰, 경찰 등을 막론하고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다. 이는 국가기관이 공정성을 스스로 부정해 온 결과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집단마저 이 대열에 합류하는 것일까?
문제 있지만, 수정할 수는 없다?
서울대병원 측이 구성한 특별위원회가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와 관련해 '병사'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소식이다. 특위 위원장인 이윤성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수는 3일 오후 5시 30분 브리핑을 통해 "담당 교수(주치의)가 일반적으로 사망진단서 작성 지침과 다르게 작성했음을 확인했지만 주치의로서 헌신적 진료를 시행했고 임상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작성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위원장은 "사망진단서 작성은 의료기관이 작성하는 것이 아니고 의사 개인이 작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며 "담당의사에게 어떠한 외압이나 강요는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의학적 판단에 따랐으며 사망진단서는 담당교수의 지시에 따라 담당 전공의가 작성했음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자신이라면 '외인사'로 쓸 것"이라고 밝히며 "어떤 경우라고 할지라도 선행 원인이 급성 경막하출혈이면,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무관하게 외인사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진단서 지침에 나와 있는 내용"이라고 주장해 주치의의 사망진단서가 일반적인 경우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백남기 농민이 왜 사망했냐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머리 손상으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면서도 주치의가 작성한 사망진단서의 내용 수정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이 위원장의 주장은 '술을 마시긴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는 논리파괴형 수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서울대병원 특위의 얼토당토 않는 주장에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를 둘러싼 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이유다.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율배반의 언어는 대개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 위원장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그는 주치의의 사망진단서가 진단서 지침과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사망진단서 작성은 결국 의사 개인이 하는 것이라며 그 책임을 주치의에게 슬그머니 전가시켜 버렸다.
이 위원장의 발언은 서울대 의대생 102명과 동문 365명, 전국 각지의 의대생 809명이 서울대병원이 작성한 사망진단서가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수많은 후배들이 의사로서의 양심과 윤리를 걸고 사망진단서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는 타협가의 논리로 상황을 비켜 가려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핑계만 대는 서울대병원... 히포크라테스 정신 어디 있나
비겁하기는 고 백남기 농민의 주치의였던 백선하 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사망진단서가 진단서 지침에 위배된다는 이 위원장의 주장에 반박하며 "급성 경막하출혈 후 최선의 진료를 받은 뒤에 사망에 이르렀다고 하면 외인사로 표현할 것인데 환자분께서 최선의 진료를 받지 않고 사망에 이르러 병사로 기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백남기 환자의 가족들은 고인이 평소 말씀하신 유지를 받들어 여러 합병증에 대해 적극적으로 치료받길 원하지 않았다"며 "사망 6일쯤 전부터 급성신부전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고칼륨혈증이 이어졌고 고칼륨혈증에 따른 심폐정지가 직접적인 사망원인"이라며 환자의 치료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유족들에게 오히려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유족들은 백 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유족들은 애초 고 백남기 농민이 병원에 실려 올 당시 서울대병원 측이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수술을 받는 이후에도 백 교수가 "현재는 장기가 건강해서 제한 없이 약물을 쓸 수 있지만 약 가지수가 늘어나면 향후 다발적 장기 부전이 와서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애초부터 백 교수와 서울대 병원 측이 고 백남기 농민의 상태에 대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고, 이후 진료에 따른 부작용을 예상했던 만큼 '병사'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위협) 소속 의사들도 유족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인위협 소속 이보라 교수는 "초반에 외상으로 인해 의식이 소실되었고 이 상태에서 계속 약물투여를 한다면 급성 신부전이 올 것은 전문가라면 누구든 예상할 수 있다"며 "이를 두고 병사라고 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했고, 김경일 교수 역시 "왜 희망도 없는 환자에게 적극적으로 수술을 권했는지, 수술하고 치료를 하면서 왜 이렇게 길게 끌고 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서울대 병원 측과 주치의였던 백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수많은 의학전문가들은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을 '병사'로 기록하고 있는 사망진단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사망진단서의 공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사망진단서 논란 때문에 구성된 특위와 주치의였던 백 교수는 전문가는 물론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직사한 물대포에 의해 쓰러져 사경을 해매다 사망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사고 당시의 영상이 담긴 CCTV는 물론이고 서울대병원의 진료기록과 관련자 진술 등을 통해서도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측은 고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직접적 원인이 '심폐기능정지'에 의한 '병사'라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정치적 외압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주치의로서 이날 브리핑에 참석했던 백 교수 역시 진단서에는 '문제가 없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서울대병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의료시설과 의료진을 자랑하는 의료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고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의 내용과 관련해 서울대병원 측의 주장에 전혀 수긍을 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사망진단서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양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