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투쟁의 기억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유난히도 길고 지루한 폭염만이 아니었다. 전격적으로 발표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배치 결정에 반대하는 성주의 투쟁은 처음에는 성주 배치 반대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한반도 배치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이제는 강정을 포함해서 먼저 평화운동을 해 온 다른 지역과 연대를 모색할 만큼 성장해가고 있다. 서울 종로 무악동 아파트 건설현장에서는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우려들을 뒤로 하고 강제퇴거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여 지난 8월말 '옥바라지 골목' 보존에 일정한 성과를 얻어냈다.
강남역 인근의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면서 포스트잇을 붙였던 대중들은 여전히 인터넷 안팎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으며, 구의역에서 희생된 청년노동자에 대해서도 많은 시민들이 '나는 너다'라는 쪽지를 붙이며 애도하였다. 한편 이화여대에서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신설을 반대하면서 학교 본관을 점거하고 교내에 투입된 경찰에 굳건히 맞선 끝에 결국은 다른 어느 대학의 교수나 학생들도 이뤄내지 못했던 성과인 대학의 정부재정지원 사업 참여철회를 이끌어낸 바 있다.
지난 몇 달간 기억나는 투쟁들만 꼽아도 이러할지니, 현재 우리 사회 곳곳이 모두 운동의 현장 아닌 곳이 없는 셈이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 가족들이 거듭 일깨워 준대로,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나의 삶은 안전하며 사회의 부조리와 무관하다고 장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언제든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활성단층 위의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밀집한 원자력발전소의 문제를 보나, 공용화장실이나 종교시설과 같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에서 불의의 희생자가 된 여성들을 보나, 또 일터에서 참사를 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끊이지 않는 현상을 보나, 한국사회는 이제 어떤 임계점을 넘어 어디서든 사고가 터져 나올 수 있는 '임계사회'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한국사회 곳곳이 이상 징후를 보이는 상황에서, 많은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세월호 유족들의 싸움은 진실을 인양하기까지 아직도 먼 길을 걸어야만 할 것이고, 4대강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구조적 전환은 요원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리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예기치 않은 현장에서 일어난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때로 승리하기도 한 시민들의 투쟁은 지난 10년 가까이 정권의 퇴행적 행태 속에서 공론장이 축소되고 시민운동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성숙하고 발전한 시민들의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새로운 운동에 대한 우려들하지만 여러 부문에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새로이 등장하는 운동들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처음 성주에 사드배치가 결정되었을 때 그간 현 정권과 보수정당을 지지한 책임을 물으면서 자업자득이라고 한다든지, 이화여대의 투쟁에 대해서는 학벌기득권 지키기로 비난하거나 시위 참여 여성들에 대해 비난과 조롱, 성희롱을 서슴지 않는 것 등 냉소를 보낸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현재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지진피해 지역에 대해서도 지역감정을 드러내는 반응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이러한 냉소의 근저에는 절대 공감해서는 안 되는 수준의 무분별한 지역 혹은 여성혐오적인 반응도 있지만, 동시에 전통적으로 정권의 지지기반으로 간주되어 온 지역의 투쟁 혹은 상대적으로 학벌의 기득권층으로 생각되던 학교의 투쟁에서 생겨난 낯선 투쟁 주체들에 대한 이질감도 깔려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동성애 차별에 반대하면서도 한국도 아닌 미국의 올랜도에서 일어난 참사에 애도를 표하는 한국의 동성애 공동체에 대한 거부감도 거기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극복해야 할 냉소나 낯설음을 넘어서 새로운 종류의 투쟁이나 운동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두고 함께 고민해봐야 할 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직되지 않은, 때로는 조직을 거부하는 시민들이 보여주는 운동 방식들은 신선하고 발랄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사회운동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고민을 안겨줄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우려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화여대에서 점거 투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총학생회나 기존의 학생운동 세력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면서 농성장의 출입이나 발언권을 제한하는 등 외부세력과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투쟁임을 표방하였던 것은 이화여대가 상대적 특권층으로 보이는 '명문' 여대라는 사실과 맞물려 우려뿐 아니라 일각에서는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기를 주저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물론 이제까지 외부세력의 개입을 트집 잡아서 투쟁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삼아온 정부의 행태를 기억한다면, 이를 그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일부에서는 운동권 노래가 아니라 걸그룹의 노래를 부르는 새로운 문화 덕에 투쟁이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도심 집회에서 사회운동 단체들의 깃발이 환영받지 못한다든지, 민주화운동이라는 말에 대해 일베처럼 모욕을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다지 낯설지 않는 존재가 된 지 오래임을 생각한다면, 사실 이화여대에서 일어난 일에 놀랄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시대적인 변화로 수용하는 편이 좋을 수도 있고, 조직화와 연대를 논하는 것 자체가 낡은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의 꼰대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운동문화에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도, 운동권을 배제하거나 사회운동을 연대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선을 긋는 것 자체로만은 민주주의가 담보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새로운 흐름이 출현하는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의 운동들도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운 연대를 위하여우선 기억해야 할 점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한국사회가 이미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예기치 못한 방식의 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임계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정한 작업장이나 지역, 이슈를 중심으로 상당 기간 조직화를 이뤄온 분야에서 뿐 아니라, 어제까지도 상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문제가 터져 나오고 여기에 대한 저항도 일어나는 중이다.
따라서 통상적 관념을 벗어난 운동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시대이며, 기존의 운동 방식을 유지하거나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흔히 보게 된다. 실제로 다양한 투쟁들은 각자 그 내부에서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적 관습이 서로 다를 수 있으며, 다양한 주체들끼리는 서로의 배경과 역사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안다 해도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기존에 다뤄지지 않았던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는 세력은 거칠고 모난 부분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의 체제가 가진 모순에 대해 문제를 삼고 저항하는 운동이 끝없이 생겨난다는 그 자체일 것이다. 사회의 문제가 더 이상 덮어둘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다고 해서 모든 사회가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한국 사회 역시 문제가 있는 모든 부문에서 다른 목소리와 새로운 운동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다수는 한국사회를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큰 흐름에서 만나고 함께할 여지가 있을 거라는 느슨한 낙관주의일지도 모른다. 막연해 보일지라도 그러한 낙관적 전망 없이는 다양한 운동 주체의 등장과 이슈의 다양화가 서로에게 희망이 아니라 갈등과 혼란의 요소가 되는 어이없는 상황으로 귀결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새로운 운동들이 연대와 조직화를 거부한다고들 쉽게 말하지만, 이는 조직과 연대에 대해 특정한 관념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새로이 등장하는 운동들 자체가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운동이 생겨나고 변화해가는 과정 역시 매우 유동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운동에서 나름의 연대와 조직화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운동이 무엇인지, 연대와 조직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선입관을 거두고 단기적인 시야에서 조급하게 판단하고 재단하지 않는 일이다. 임계사회란 그 속성상 언제 어디서든 문제가 터져 나오게 되어 있는 비상상황이며, 끝없이 새로운 저항이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결국 새로운 운동이나 기존의 시민정치이나 모두 이러한 임계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방식의 조직화와 연대를 고민해야 하는 숙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백영경님은 방송통신대학교 문화인류학 교수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