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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칼로 권력을 잡은 사내는 그를 잡아 가두려 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집회를 대학교 내에서 주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수배를 피해 인천의 갈멜수도원으로 몸을 숨겼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는 꿈 많은 20대 대학생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고, 그는 유신헌법에 맹렬히 반대하던 학생이기도 했다.
수도원에서 피신한 얼마 뒤 총과 칼로 권력을 잡은 사내가 머리에 총상을 당하고 숨을 거뒀다. 드디어 생명이 움트는 '봄'이 오는 듯했다.

1979년 그는 그렇게 세상에 다시 나왔다. 학교로 돌아간 그는 학교를 장악했던 학도호국단을 몰아내고 재건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렇게 서울의 봄이 왔다. 하지만 꿈꾸던 좋은시절은  너무나도 쉽게 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끝은 쉽게 손에서 놓지 못했다. 1980년 5월 15일 중앙대학교 학생 4천명을 이끌고 한강도하 투쟁을 주도했다.

1980년 5월 17일 그는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됐고, 감옥에서 그는 퇴학 조치를 당했다. 고향인 전남 보성군 부춘마을의 수재로 불리던 그의 대학생활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고, 세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백도라지, 백두산, 백민주화로 지었다. 그는 백민주화를라는 딸 아이 이름을 지으면서 10년 후에는 이 이름이 흔해질 거라 믿었다. 그의 믿음은 이뤄졌을까. 불행히도, 그는 그의 딸이 정권을 잡고 있는 2016년 세상을 떠났다. 머리에 대포와 같은 물을 맞고서...


그가 수배 시절 몸을 숨기고 수도사 생활을 했던 인천 갈멜수도원이 있던 인천에 백남기 선생 분향소가 마련됐다. 인천 부평역 앞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은 한 60대 후반의 노인은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과 싸우면 죽는다"며 "마음은 아프지만, 그냥 참고 사는 게 오래사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백남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이유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의 후배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분향소를 찾았다.

아이와 함께 분향소를 찾은 김고은씨는 "부당한 나라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나라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든다"며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얘기할 곳이 없다는 게 제일 힘든 것 같다"고 현 정권을 비판했다. 이어 "(백남기 선생이)죽고 나서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적는 부당한 행태들이 있다. 나도 어른이지만 떳떳하지 못한 것들에 화가 많이 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고은씨의 남편 박상훈씨도 "공권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응을 하면 안된다. 나도 군복무를 경찰과 함께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냥 막고 있었어도 될 부분이었다. 물대포를 쏘는 대응은 아니라고 본다. 그 물대포로 사람이 죽었다"고 경찰의 과잉 대응을 꼬집었다.

백남기 선생의 분향소를 찾은 방희재씨도 "백남기 옹이 투사로 싸웠다. 백남기 선생의 명복을 빌고, 우리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도 많이 주셨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백남기 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익명을 요구한 대학생은 "국가가 부당함을 자행하는데 그냥 앉아서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고 되물은 뒤 "백남기 선생의 정신을 이어 조금 더 잘 살수 있는 나라를 우리 대학생이나 후세들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인천지역연대는 지난 4일 부평역 광장 안에 '백남기 농민 시민분향소'를 차리고 시민들의 조문을 받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1인미디어 '미디어인사이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백남기 선생, #물대포, #국가살인, #인천분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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