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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예전에 아토피를 심하게 앓았다. 팔과 무릎 뒤, 사타구니 등 살갗이 접히는 부위는 말할 것도 없고, 입 주변과 귓불 뒤까지 몸 곳곳에서 진물이 흘렀다. 긁지 못하도록 손에 장갑을 끼우는 한편, 거즈로 온몸을 미라처럼 감아야 했을 정도다. 아토피로 밤과 낮이 뒤바뀐 생활은 우리 가족의 삶을 온통 피폐하게 만들었다.

전국에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은 죄다 다녀봤고, 아토피에 좋다는 건 다 먹이고 발라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아이와 우리 부부는 5년 가까이 아토피와의 전쟁을 벌였고, 이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이와 함께 오른 산에서 끝내 답을 찾았다. 여기저기 흉터는 남았을지언정 이젠 더 이상 진물이 나지 않고, 긁어대지 않는다.

  아토피가 발병하면 피부가 붉게 부풀어오르고 발진, 가려움증, 진물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아토피가 발병하면 피부가 붉게 부풀어오르고 발진, 가려움증, 진물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 키우미 한의원

아이와 나는 수차례 지리산을 종주했고, 매주 백두대간을 걸었다. 처음엔 맑은 공기와 숲 속의 피톤치드의 영향이라고 믿었지만, 그보다는 시나브로 길러진 체력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느덧 아들이 중학생이 된 지금, 산을 찾는 횟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그 대신 매일 삼시세끼 챙겨 먹듯 즐겨 하는 운동이 아이가 아토피를 이겨낸 힘이라 믿고 있다.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 축구 대표 선수로 뛰었다. 학교 스포츠클럽 대회에 나가 지역에서 우승한 뒤 전국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축구가 생활의 일부가 됐다. 또래들 다 가지고 있다는 스마트폰은 아직 없지만, 그의 신발장에는 거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서 쟁여놓은 축구화로 가득하다. 아토피(Atopy)는 '알 수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비롯됐지만, 그럼에도 체력이 답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있다.

벌써 10년이 다 된 지난 옛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국회의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활동이 10월 4일로 종료됐다는 뉴스를 들어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국민적 관심사가 된 마당에, 피해 구제와 재발 방지 대책 등 정작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 첫발도 내디디지 못했는데 유야무야 끝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사실 지난해 초 환경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해 2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공식 인정한 숫자보다 몇 곱절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망과 폐 손상에 이를 만큼 큰 피해는 아닐지라도, 폐 기능이 약화되어 병치레하는 사례는 부지기수일 거라는 생각에서다. 당시 환경부는 총피해자 수가 '고작' 221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92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내 경우에 비춰봤을 때 피해는 훨씬 더 광범위 할 것으로 여겨진다.

'보습' 위해 가습기 사용, 지금 와 생각해보니...

아이의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간 전국의 한의원마다 이구동성 말하는 진단은 바로 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폐주피모(肺主皮毛)'라 하여, 폐 기능이 약화되면 가려움과 부종 등 피부에 각종 염증을 일으킨다는 설명이었다. 이에 대해 전국의 한의사들로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진단과 처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울 정도가 됐다.

물론, 그들이 처방해 준 약들이 별로 신통치는 않았지만, 폐에 좋다는 온갖 민간요법에 자꾸만 귀가 솔깃해지곤 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에게 생강을 달여먹이기도 했고, 굳이 싫다는 도라지즙을 물 대신 마시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이름조차 생소한 맥문동을 구해다 차를 끓이는가 하면, 심지어 매운 마늘까지 갈아서 아이의 입에 욱여넣기도 했다. 오죽하면 부모로서 죄짓는 느낌마저 들었을까.

그런데 한의사들과는 달리 일반 병원과 약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피부가 건조해지지 않도록 보습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것이었다. 자주 씻기지도 말고, 목욕 후에는 보습제를 충분히 바르라면서 꽤나 비싼 제품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특히 건조한 겨울철에는 아이의 방에 축축한 빨래를 널어두거나 가습기를 적극 활용할 것을 권장했다.

자식이 아토피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의사, 의사, 약사의 말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는 '진리'였다. 그들이 처방한 것들이 대개 부질없는 짓임을 나중에야 비로소 깨닫게 됐지만, 당시엔 설령 의심이 가더라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김없이 따랐다. 아내의 화장품보다도 더 비싼 보습제를 구입하고 값비싼 가습기를 장만한 것도 바로 그즈음이다.

집은 온갖 국내외 보습제의 백화점이 됐고, 장마철이 아닌 다음에야 집에서 가습기 작동이 멈춘 적은 없었다. 가습기 청소는 사용설명서에 나온 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했고, 세균 번식을 막는다는 살균제도 가습기에 무슨 보약 먹이듯 잊지 않고 사서 넣었다.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곁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이의 모습이 그땐 왜 그리 편안해 보였던지.

 잘못 사용하면 득보다 실이 많은 가습기.
잘못 사용하면 득보다 실이 많은 가습기. ⓒ  

아이가 잠시라도 긁지 않고 환하게 웃어줄 때면 가습기 덕이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가습기에 물이 떨어졌다는 램프에 불이 깜빡거리기라도 할라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아토피엔 가습기가 특효라며 주위에 떠벌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가습기가 아이의 아토피를 시나브로 완화해줄 것이라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 한 가지, 가습기 사용에 주의할 점이 있다고는 했다. 바로 가습기 내부에서 세균이 쉽게 증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결국 살균제 사용을 권장한 셈이다. 게다가 TV 등을 통해 살균제 광고까지 나오는 마당이었으니, 가습기와 가습기 살균제는 아토피 환자가 있고 없고를 떠나 모든 가정의 생활필수품처럼 받아들여졌다.

결과적으로, 온갖 보습제도 값비싼 가습기도 아이의 아토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보습제가 잠시나마 가려움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이라도 했다면, 가습기는 '헛된 기대'만 잔뜩 심어주었을 뿐이다. 이제 와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살균제도 넣지 않고 가습기를 틀었다'는 이유로 아내와 난 며칠 동안 부부 싸움을 한 적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특위'는 계속되어야 한다

몇 해가 흘러 아이에겐 등산과 운동이 특효라는 걸 깨달은 다음에야 비로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새삼 보습제와 가습기가 치료제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비싼 보습제에 연연하지도 않고, 굳이 살균제 사 넣어가며 가습기 트는 일도 멈췄다. 차라리 물을 자주 마시는 게 더 낫다는 걸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워밍업 - 월출산에서 2009년 9월에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워밍업 - 월출산에서 2009년 9월에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 서부원

다만, 가습기 살균제가 폐 기능 손상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지금, '폐주피모'라는 한의사들의 진단이 정확하다면 아이의 아토피가 가습기로 인해 완화되기는커녕 악화된 건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든다. 공교롭게도 가습기 사용을 중단한 이후 아이의 아토피는 시나브로 좋아졌다.

아이는 지금도 아토피와 같은 면역계 질환이라는 비염으로 고생은 하고 있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 흡사 거북이 등껍질 같던 아이의 살갗이 새살 돋듯 뽀얗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요즘 같은 환절기 때마다 연신 콧물을 닦아내고 재채기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해도 아토피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회의 '가습기 살균제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핵심 사안인 피해 구제와 재발 방지 대책은 말할 것도 없고, 폐 기능 약화와 관련된 질병의 사례까지도 폭넓게 다루어지길 소망한다. 솔직히 이제 와 배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아토피와 가습기 살균제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에 대해선 명쾌한 답변을 듣고 싶다. 이는 과연 억측일 뿐일까?


#가습기 살균제#아토피#가습기 살균제특위#아토피성피부염#아토피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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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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