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좋네, 나쁘네를 평가할 능력은 안 되지만, 제 안에선 자동적으로 좋은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을 거르는 필터가 작동하긴 합니다. 책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기에, 주로 이 필터를 거쳐 '좋은 소설'로 판명된 소설에 대해서 열심히 떠들곤 하는데요. 좋은 소설에 대해 말한다는 건, 좋은 삶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은 듯해요. 좋은 소설이 전해주는 감동과 여운은 마치 진심을 다해 열심히 삶을 살다간 한 사람이 주는 그것과 같으니까요.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소설가들 스스로 자기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고백(?)하는 걸 쉽게 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이런 거짓말 하나쯤은 세상에 남기고 싶어 졌네' 하면서 글을 썼다는 것이죠.
그들 중 일부는 거짓말만 가득한 소설에서 진리라든가, 진실이라든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이라든가를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읽는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소설은 다 거짓말일 뿐이라며 그냥 무시해 버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나는 농담이다>에서 소설가 김중혁도 이렇게 말하지요.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소설이 간단한 문제가 아닌 건, 그 속에 누군가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걸어간 길이 있죠. 길엔 목표와 방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이 허무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같이 고군분투하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삶의 예시, 또 하나의 살아갈 방도가 되어 줍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게 좋은 소설은 이런 '방도'를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책을 딱 덮었을 때, 재미있었다고만 느끼게 하는 소설보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의미 있는 힌트를 주는 소설, 다시 한번 살아갈 힘을 주는 소설들이 전 좋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방도는 소설가의 주관적인 방도입니다. 그래도 그 주관적인 방도가 나의 지난 몇 년을, 나의 지난 며칠을 따뜻이 감싸준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원래 알고 있었으나 잊고 있던 방도여도 괜찮고, 미처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던 방도여도 좋으며, 아주 잠시 스쳐지나가는 방도여도 상관없습니다. 단지, 또 한번,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면 역시 그것만으로도 족하니까요.
프랑스 소설 <오봉로망>에선 좋은 소설을 이렇게 정의하지요. "세상이... 희미하게 악의 편이 되고 앞으로도 가슴을 찢을 고통만큼 확실하게 그럴 것이라 생각될 때,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증명하는 책", "인간의 비극도, 일상의 신비도 우롱하지 않는 책", "우리를 다시 숨쉬게 하는 책"이라고요. 그러니까, 저도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해주는 소설. 이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 되겠지요.
농담으로 치유되는 삶
그런 면에서 <나는 농담이다>는 제게 좋은 소설입니다. 지난 얼마간 조금은 낙심해 있던 제게 작은 농담 하나를 건네준 책이거든요. 그리고 이 '농담'이 '방도'가 되어 제게 다시 하늘을 올려 볼 힘을 주었거든요.
책의 마지막에서 세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전부 위를 올려다 보세요. ... 하늘이 보인다고 상상하세요. ...잘하셨어요." 하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이 책. 이 책은 익살맞은 농담이 어떻게 삶을 치유해주는지를 보여줍니다.
소설엔 남겨진 사람들과 떠난 사람들이 나옵니다. 송우영은 남겨진 사람입니다. 낮에는 컴퓨터 A/S 기사로 일하고, 밤에는 코미디 클럽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어 사람들을 웃깁니다. 우영이 코미디언이 된 건, 무의미 한 삶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함이었는데요. 우영은 농담을 통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떠난 사람은 이일영과 이일영의 어머니이자 송우영의 어머니인 정소담입니다. 송우영은 이일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뒤 찾은 편지에서 이일영이란 이름을 발견하지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일영이 어렸을 때, 정소담은 아들을 버리고 나옵니다. 이일영의 오랜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 마침내 우주로 나간 이일영. 그리고 그곳에서 일영은 영영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 소설에서 우주라는 공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이 아닌 꿈, 이상, 목표를 상징하는 공간이면서 소설의 마지막 농담이 실현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보다 일영은 우주에서 홀로 죽음을 맞지요. 죽기 전 일영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목소리로요. 딱 한번 본 동생의 코미디를 기억하며 농담을 하고, 어머니의 행복을 바라기도 하지요. 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듯, 한 발 떨어져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던 일영은 "마지막까지 신나게 즐기다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돌고 돌아 송우영의 귀에 들어오지요.
소설 속 인물들은 반쯤은 고꾸라진 채 삶을 살아갑니다.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고, 지난 선택을 후회하고, 앉아서 슬피 울지요. 때론, 우리도 그러는 것처럼요. 이런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이 바로 농담이었습니다. 농담을 통해 현실을 비껴가고, 현실을 비껴가면서 현실을 이겨내지요. 슬픈 가운데에서도 웃고, 웃음으로써 슬픔을 용기 있게 통과해 나아갑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농담처럼 기상천외한 행동을 통해 슬픔과 그리움을 이겨내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송우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살 곳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를요. 어떤 모습으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말이죠. 송우영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말 속에 살 겁니다. 말 중에서도 농담 속에서 살 겁니다. ... 비참한 사람들끼리 하는 농담 속에도 있고, 계속 울음을 터트리다가 갑자기 터져나오는 농담들 속에도 있고, 여자와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작업하는 남자들 속에도 있고, 오랜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여자들의 농담 속에도 있고, 모든 농담 속에 스며 있었으면 좋겠어요. - 본문 중에서
삶이 거대한 무의미의 바다라면, 농담은 그 위를 떠다니는 작은 조각배가 아닐까 싶어요. 삶에 빠져 하염없이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래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슬퍼하느라 잊고는 있지만, 우리 옆에 늘 있어주는 건 바로 이 조각배, 농담일 겁니다.
그리고 이 조각배에 손을 뻗치는 순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지요. 그러니, 힘이 들 땐 그냥 한 번 농담을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웃어보는 겁니다. 인생 뭐 있나, 하면서요. 이렇게 웃으면 그만이지, 하면서요. 이왕이면 그간 잊고 있던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말이지요.
덧붙이는 글 | <나는 농담이다>(김중혁/민음사/2016년 08월 26일/1만 3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