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M의 인도네시아 콘서트에 가려는 친구였었나 봐요. 강의 첫 시간에 'oppa, buka baju(옷을 벗다)'를 한국말로 어떻게 하는지 묻는 겁니다. 말 그대로 해석해줬죠. '오빠, 옷 벗어'라고요."당종례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 부원장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쿡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함께 인터뷰에 응한 강사 조은숙 선생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내가 한국문화원을 방문한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주말의 한국문화원 풍경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수강생들 발걸음으로 부산했다. 마주 보면 활짝 웃고 마주치면 목례를 하거나 인사말을 건네는 인도네시아 젊은이들, 이들과 마주칠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이름 모른 채 스쳐도 향을 선물하는 만개한 보랏빛 들꽃의 모습이다.
"오늘 두 분을 뵈니 연예인 느낌이 나요. 수강생들에게 인기 많으시겠는데요?"당 부원장과 조은숙 선생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인터뷰에 배석한 두 수강생 Renaldy씨와 Isna씨는 내 말을 알아듣고 찬성한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당 부원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문화원 한국어 수강생들은 대개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가 주류를 이룹니다. 대학생, 교사, 회사원 등이 많고요, 다수가 여성입니다. 드라마나 케이팝을 통해 한국을 좋아하게 되고 한국어 배우기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한류스타를 만나 한국어로 인사하거나 말을 걸기 위해 한국어를 배운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렇다. 가르치는 목적과 배우는 목적은 분명 다를 수 있다. 가르치는 목적이 공적이고 이상적이라면 배우는 목적은 개인적이고 현실적이랄까? 아무튼 그래도 그렇지 연예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외국어를 배운다니 목적이 참 흥미롭다. 왜지? 하고 곱씹게 되는데 차라리 산뜻하다는데 생각이 멈춘다.
"물론 한국 유학, 한국 기업 취업 등의 꿈을 가진 수강생도 있지요. 하지만 대다수가 취미로 한국어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이 취미가 더욱 흥미를 갖게 돼서 꾸준히 공부한 끝에 한국으로 유학도 하고, 한국 기업에도 취업한 경우가 꽤 있습니다. 세계 최대 이슬람 신자를 보유한 인도네시아인지라 폐쇄적이고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예요. 그 특성이 강하지요. 타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고 습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요즘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트렌드가 한국이래요. 그래서 한국어를 한번 배워보려 한다고 쉽게 말해요."
해외 한국문화원의 역할이 한국문화 전파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이 말과 글에 있으니 문화원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역할 중 역할이라 하겠다.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 세종학당 운영 또한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함일 것인데, 수치로 드러난 내용을 보니 그 성과가 놀랍다.
2016년 9월부터 2학기 강좌가 이어지는 현재 수강생이 523명, 강사가 16명이라 했다. 여덟 단계로 구성된 커리큘럼을 단계별로 60시간을 공부해야 한다니 총 480시간을 이수해야 수료가 가능하다. 보통 평일반의 경우 주2회로 2시간씩 15주를 공부하며, 주말이나 휴일 반은 주 1회 4시간씩 15주를 공부해야 한다. 현재 진행되는 학기가 15기인데, 각 단계를 마치고 수료증을 받은 학생이 지금까지 4758명이라 했다.
- 당 부원장께서는 보람도 느끼겠지만 운영에 어려움도 많겠는데요?"매번 수강신청 기간이 되면 전쟁 아닌 전쟁을 치릅니다. 이번 학기 523명이 수강하고 있는데, 수강신청 인원은 973명이었어요. 신규 등록하려던 학생 450명이 강의실 부족으로 수강을 할 수 없었습니다. 450명 중에는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려는 1단계 학생이 250명이었습니다. 강의실이 4개밖에 없다 보니 신규 수강생을 원하는 만큼 받아들일 수 없어 아쉬움이 큽니다.
그래서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문을 엽니다. 학생들 요청에 따른 것이지요. 멀리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오고, 몇 시간씩 운전을 하고 오는 수강생도 있습니다. 연속 4시간 공부를 하는 주말반을 보면 정말 대견합니다. 잠깐 휴식시간이 있지만 긴 시간 견디느라 아마 엉덩이가 아플 것입니다. 저도 경험했지만 강의하는 선생님들 모두 목이 아프다고 하거든요."
- 억지로 누가 시켜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니 수업 분위기가 아주 좋겠어요. 강의 중점은 어디에 두나요?"저희 세종학당은 일반 어학원과는 좀 달라요. 말과 글 속에 녹아 있는 우리 생활 모습과 문화를 전달하려 하죠. 따라서 한복 입기, 전통 놀이, 한국어 웅변대회, 노래자랑 등 문화행사를 연계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오직 한국인에게만 강사 자격을 부여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한국인을 통해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제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것이 저희 문화원의 목적이죠. 강사님들은 모두 일정 자격을 취득하신 분들이에요. 모든 수강생들이 한국과 한국인의 삶을 보다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튼튼한 다리를 놓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님들이 역할을 많이 해주고 계시지요. 열여섯 분의 열정과 열성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 아까 보니 조은숙 선생님은 수강생들과 스킨십이 많습니다. 사진자료를 봐도 그야말로 함께 노는 모습이 많은데 그 모습에서 즐거움이 묻어나는 것 같더라고요. 보기에 정말 좋습니다. 세종학당과 인연을 맺은 과정 좀 이야기해주세요."같은 대학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전공한 남편과 결혼하여 인도네시아에 온 것이 인연의 시작입니다. 청년기부터 교회나 봉사단체에서 교사역할을 많이 해서인지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뒤 현지인에게는 한국어, 한국인에게는 인도네시아어를 가르쳤습니다. 좀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으로 한국어 교사 양성과정을 마쳤습니다. 한국어교사 2급 자격증도 취득했지요. 가르치는 일로 동분서주하다보니 벌써 인도네시아에서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 그 세월 반은 한국인, 반은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살았네요?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셨을 것인데 그들의 입장이 된다면 뭘 이루고 싶은지 털어놔 보시죠."우선 한국말을 잘하고 싶지요.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꼭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한국 회사에서 일하고 싶고, 가능하면 한국인과 결혼할 거예요. 배우자와 실컷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드라마에서처럼 좀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서 뚜껑에 덜어 후후 불며 먹고 싶기도 하고요. 불고기, 김치 등도 많이 만들어 먹고 싶어요.(웃음~)"
그는 이 모두가 제자들이 한 말이라 했다. 간절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의 꿈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선생에게서 표정으로 드러난다. 몇 가지 에피소드 소개로 이어졌다.
"학습 시간에 친한 친구와는 보통 반말을 한다 했더니 대뜸 제게 '선생, 우리 같이 밥 먹으러 가자!' 하는 겁니다. 한 번은 장난을 치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진 학생이 '아이고 아버지'하는 거예요. 연속극깨나 봤던가 봅니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귀엽고 여린 목소리로 '엄마야~' 하라고 했지요.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썰렁하다, 쌀쌀하다, 시원하다 등 날씨에 대한 형용사를 실컷 설명했는데,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그게 무슨 차이냐는 의미지요. 인도네시아어로는 sejuk(서늘한, 시원한, 선선한) 한 단어로 다 통한다는 겁니다. 일 년이 건기와 우기로만 나뉘고 그마저 날씨 변화가 미미한 편이니, 단어와 사람의 느낌에서 환경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새삼 배웁니다."
- 자 그럼 이제 남자 수강생 Renaldy씨에게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아주 우수한 수강생이라 들었어요. 자기 소개 좀 해주세요."예, 저는 스물일곱 살이고 직업은 선생입니다. 개인학원에서 만다린을 가르치면서 한 중학교에서 파트타임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 지난번 세종학당 자체 한국어 웅변대회에서 1등 했다고요? 한국어 학습은 르날디씨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1등을 한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습니다. 먼저 알라신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어 배우는 것은 저를 즐겁게 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합니다. 선생님께 감사드려요. 제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것이 한국 여행입니다. 드라마 촬영한 곳도 가보고 싶고 한국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싶고요."
그는 젊음을 맘껏 즐기는 중이라 했다. 방대한 영토와 자원을 가진 인도네시아 젊은이로서 자부심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미래에 대해서도 한마디로 여유로웠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이라면 설사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다. 그 확신의 근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답은 명쾌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종교'였다. 옆에 앉아 미소로 일관하는 여성 수강자 Isna씨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한국어 배우면서 한국이 너무 좋아졌어요. 아버지 = 아야(Aya), 둘 = 두아(Dua)와 같이 비슷한 발음이 있고, 강구(Ganggu)처럼 발음도 같고 의미도 거의 같은 말이 있어서 너무 신기합니다. 수업시간에 매우 열중하는 편인데요.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다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의 이름만 들먹여도 저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러요. 그리고 이건 선생님께 숨긴 건데요, 지난번 슈퍼쥬니어가 올 때 공항에 나가고, 또 빅뱅 콘서트에 가느라 수업을 빼먹었어요. 선생님께는 정말 죄송해요."모두 다 웃었다. 구김살 없는 그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곧 570주년 한글날을 맞는다. 매년 반복되는 한글날이다. 하지만 해외 동포들에게 한글날은 늘 새롭다. 모국어의 소중함과 어디에 살아도 모국의 문화를 외면하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한국어와 한국문화로 하나가 된 현장,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 세종학당 탐방은 내게 참 흐뭇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젊은이 비율이 세계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나라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의 국책은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이다. 그들의 포용성, 긍정적인 자세가 한국문화원에서 웃음으로 피어나서 좋았다.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에게 간절히 배우고 싶은 대상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현장이 참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