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수정 : 14일 오전 9시 32분]김상숙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였다. 그는 '10월 항쟁'과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을 조사하던 조사관이었고 나는 그가 쓴 소중한 조사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주한외국특파원들과 해외언론인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대구 10월 항쟁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은 지난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과 다수 위원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 등 수구인사들로 교체되면서 진실규명보다는 은폐에 무게가 실렸다는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10월 항쟁'을 '폭동'으로 서술하라는 압박에 격론
지난 2010년 '대구 10월 항쟁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 보고서가 가까스로 진실규명 결정을 위한 진실화해위원회 전원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내가 진실위 직원이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김용직 상임위원과 이영조 위원장 결재 단계에서 '대구 10월 항쟁 사건'의 성격을 '항쟁'이 아닌 '폭동'이라고 서술하라고 압박을 가해 내부에서 격론과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 10월 항쟁을 '항쟁'도 '폭동'도 아닌 '10월 사건'으로 명하게 된 이유다.
김 박사는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폐업'된 후 지난 6년간 다른 일을 하면서 틈틈이 '10월 항쟁'에 관한 연구와 저술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간절히 원해서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현실은 고됐다. 국가폭력에 희생당해 죽은 사람들 명단에 빠져 연구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종종 묻기도 했다. "내가 도대체 지금 뭐하는 짓인가?" 그는 남들과 동떨어진 채 1940년대 거리에서 혼자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이런 간난신고 끝에 지금 <10월 항쟁>이 최근 출간됐다. 김 박사는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왜냐면 김 박사에게 이 책은 지난 9년 동안의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그는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감회를 나누었다.
'10월 항쟁'에 대한 연구서는 지난 1988년 정해구 교수(성공회대) 단행본이 최초로 세상에 소개 되었다. 그 후 한 세대가 흐른 28년 만에 나온 단행본 연구서가 김 박사의 <10월 항쟁>이다. 10월 항쟁을 직접 겪은 구술자이자 증언자들이 이미 많이 운명한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이런 종류의 생생한 연구서가 세상에 다시 소개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발간에 대한 감회를 김 박사는 이렇게 전한다.
"이 책이 10월 항쟁 70주년에 맞춰 10월 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대중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해방 공간의 거리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또는 산에서 활동했던 무명 활동가들, 형무소로, 골짜기로, 바다로 속절없이 끌려간 님들을 기억하고 해원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도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지금 투쟁 일선에 계신 분들께는 우리 내면에 흐르는 항쟁의 역사적 DNA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연구자들께는 전쟁 전 빨치산 연구와 같은 분야에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대구에 계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대구가 고담의 도시가 아니라 진보의 진원지였음을 기억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지난 4일부터 김 박사와 이 책에 관하여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10월 항쟁은 건국운동이자 시민 항쟁"
- 1946년 10월 항쟁은 어떤 사건인가?
"1946년 10월 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면서 발생한 사건'(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이다. 동학농민운동이나 3·1운동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일어난 이 항쟁은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고, 그 관련자들은 한국전쟁 시기까지 계속 학살되었다."
- 이번에 출간한 <10월 항쟁>은 어떤 책인가?"<10월 항쟁>은 1946년 10월 항쟁을 중심으로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 대구·경북 일대의 사회운동과 학살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책이다. 이 책에서는 해방 직후 일회적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이 실제로는 미군정 하의 남한 전역에서 각 지역 진보세력 주도로 일어난 건국운동이자 시민 항쟁으로 보고 있다."
- 10월 항쟁을 '제2의 3·1운동'이라 불렀는데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린다."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그해 12월까지 남한 전역 73개 시·군으로 확산된다. 이 항쟁에는 당시 건국운동에 참여했던 조직과 노동자, 학생과 시민, 농민 등 대부분이 참여했다. 대구·경북 지역만 해도 당시 전체 인구가 317만8750명인데, 항쟁에 참여한 인원은 연인원 77만32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처럼 전국으로 확산된 항쟁이라는 점에서 '제2의 3·1운동'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이 항쟁은 1948년 제주 4·3항쟁과 여순 항쟁으로 이어진다."
- 책에서 10월 항쟁을 '미완의 시민혁명'이라 부른 건 과도한 표현이 아닌가? 논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1946년 10월 항쟁은 한국사회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수십 년간 누적된 갈등과 건국운동의 좌절에 대한 반발이 국가 형성 과도기에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월 항쟁은 미군정의 잘못된 식량정책과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도 컸지만, 친일파의 재등장에 맞서 식민지시대 수십 년 동안 쌓인 사회적 트라우마가 폭발한 것이다. 여기에 토지개혁이 지연되면서 당시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들 사이에 대대로 누적된 갈등이 표출되었던 면이 크다.
즉, 현대 한국사회의 틀이 형성되던 초기에 식민 통치와 봉건제 유산의 청산을 시도했으며, 미군정과 친일 경찰로부터 건국의 주권을 탈환하기 위한 항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민혁명의 과제를 진행하지 못한 한국 사회는 10여 년 후 4·19라는 뒤늦은 시민혁명이 뒤따랐고, 쿠데타로 인해 좌절된 시민혁명의 이상은 다시 20년 후 5·18항쟁으로 현현했다. 10월 항쟁은 이처럼 근대 민중항쟁의 전승이자 한국 현대 민중항쟁의 원형으로 한국인의 무의식 중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10월 항쟁 때 학살 당해
- 1946년 10월 항쟁을 다루면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까지 다룬 이유는?
"1946년 10월 항쟁기부터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백부인 박상희(박정희의 형, 선산 인민위원회 및 민전 간부)도 10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경찰에게 학살되었다. 그리고 대구·경북 지역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은 1946년 10월 항쟁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다. 학살은 한 세대 사회운동의 절멸을 의미했으며, 국가권력의 토대를 강화하는 폭력적 방법이었고, 초기 국가가 반공 우익 국가로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학살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반공의 사회심리 구조를 형성하고 냉전 통치성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아직도 어떤 자리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골로 가니 조심해라'라는 말을 한다. 골짜기로 끌려가 학살당했던 경험이 집단적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학살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하는 이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통해 오늘날 대구·경북 지역의 보수성의 또 다른 기원도 볼 수 있다."
- 이 책을 쓰기 위해 무려 9년이 걸렸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나는 지난 2007~2010년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대구 10월 사건'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담당한 조사관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뒤에도 항쟁 참여자 및 목격자, 유족의 증언 구술을 찾아다녔고, 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올해 10월 항쟁 70주년에 맞춰 책을 내게 되었다."
- 이 책을 집필하면서 가장 신경 쓴 요소가 있다면?"항쟁 참여자와 목격자들의 증언과 미군 문서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기존 연구에서 밝히지 못한 부분을 밝히려 했다. 즉, 1946년 10월 1일과 2일 대구에서 있었던 경찰의 발포는 우발적이었는지, 피살자는 누구이며, 시신 시위는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항쟁 지도부는 누구인지, 조선공산당 중앙조직과 지역운동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이다. 그리고 10월 항쟁 이후 사회운동이 제주 4·3항쟁과 여순 항쟁, 야산대·유격대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 한국전쟁 전 야산대·유격대의 활동, 이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 대구·경북 지역 민간인 학살 통계 등은 이전의 연구서에 다루지 않은 부분이다.
또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많이 담았다. 10월 항쟁에 참여한 학생과 노동자, 사건 목격자, 사회운동가, 현장에 있었던 경찰, 서북청년단원을 포함한 우익 청년단원, 공무원, 마을 주민, 입산 경험자, 입산자 가족,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 피해 유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 당시의 일상사를 담으려고 했다."
"<10월 항쟁>, 그 시대의 역사를 아래로부터 보여주는 것"
- 책에서 목격자들의 증언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그대로 옮긴 부분이 눈에 많이 띈다. 이 책에서 목격자들의 증언을 많이 담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책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삐라를 뿌리던 소년 소녀들, 파업을 하던 노동자,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며 공장의 담을 넘던 학생들, 항쟁에 나섰다가 경찰의 매에 못 이겨 어느 날 산으로 간 형, 그 형의 소식을 지금도 기다리는 나이 든 소년, 군경에게 끌려간 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골짜기마다 시신을 찾아다니던 어린 아낙네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항쟁 이후 말단 사회운동가들의 생활, 낮에는 군경이 지배하고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하던 '이중권력' 상황에서 빨치산 하부 구성원과 지역민의 일상생활을 다룬 부분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둡고 살벌하던 그 시대의 풍경담이기도 하고, 그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니며 성장했던 한 세대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그것은 낮은 목소리로 그 시대의 역사를 아래로부터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건이 발생한 지 70년이 가까운 이 시점에는 사건 관련자나 목격자들이 고령으로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당시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어 앞으로 이 정도의 연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그 내용을 정리했는데, 그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이 책에서는 당시 청년 세대의 경험에 초점을 두었다고 하는데, 그 의미를 좀 더 부연하여 설명하면?"청년들, 특히 10대 중학생들과 거리의 청소년들은 1946년 10월 항쟁의 주역이었다. 당시 중학생(6년제)은 10월 항쟁 후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을 벌일 때도 가장 앞장서서 활동했다. 그래서 1949년 이승만 정권이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을 때, 1949년 12월 5일 기준으로 대구 지역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3332명 가운데 학생이 1056명(32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가창골이나 경산코발트광산 등지로 끌려가 군경에게 학살되었다.
농촌에서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대중운동의 선봉대였다. 그들은 무명의 말단 활동가들로서 한국전쟁 전후에 군경에게 가장 많이 학살당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이 자주적인 조직단위가 되지 못하고 좌우 양쪽 세력의 동원단위가 되다가 학살당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진보운동의 한 세대가 절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항쟁의 주역이면서 가장 많이 희생된 이 세대에게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 대구 10월 항쟁은 제주 4·3항쟁이나 여순항쟁에 비해 그동안 이 사건의 진상이나 의의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나?
"10월 항쟁은 그동안 '좌익(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의 박헌영)이 사주한 폭동'이라는 이념적 편견이 컸다. 지난 1987년 6월 항쟁 후 지역 시민사회의 노력에 힘입어 제주 4‧3항쟁과 여순 항쟁은 '좌익세력이 일으킨 폭동이나 반란이 아닌 민중항쟁'으로 재규정되면서 사건의 역사적 성격이 '복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구·경북 지역은 정권의 지역주의 통치 때문에 지역민들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면서 그런 이념적 편견을 무너뜨릴 시민사회의 힘이 약했다.
그러나 지금은 '10월 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유족회'의 유족들과 여러 시민사회 단체에서 10월 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앞장서서 활동하고 있다. 그 성과 중 하나로 대구시의회에서 지난 7월 26일 본회의에서 '대구시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가결했다. 이 점은 무척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 김상숙 박사는 1980년대 대구의 사회운동 단체에서 일했다. 노동운동 관련 연구를 하다가 2007년에 '1980년대 대구 지역 여성노동운동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경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일을 했다.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로 근무했으며, 지금은 고려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사회학 과목을 강의하고 한국 현대사와 사회운동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5·18기념재단,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등 여러 기관의 구술조사 사업에 참여하면서 현장에서 지역민들을 만나 과거사의 기억을 되살리고, 국가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사라지고 숨겨진 이야기를 복원하여 사회적 치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농민 항쟁의 측면에서 본 1946년 10월 사건', '1948~1949년 지역 내전과 마을 청년들의 경험', '가톨릭 노동운동의 재평가를 통한 현 노동운동의 대안 모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