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열여덟. 라트비아 리가의 올드 타운과 시굴다 투라이다 성라트비아 리가의 올드 타운은 새색시 같다. 무박 2일 동안 시달린 어제와 달리 오늘 아침에는 우리도 말끔히 단장했으니 제법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관광객의 발길이 아직 드문 아침 공기는 늘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스페인 세고비아에서의 좋았던 기억도 인적 없는 새벽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모두 숙면 뒤에 보이는 편안한 얼굴이다. 가벼운 바람이 조금씩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이제 막 문을 여는 가게들이 어제 밤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여사들은 늘어선 가게를 빠뜨리지 않고 들른다. 성격 급한 송 원장은 박 지점장과 함께 먼저 사진 좀 찍겠다며 앞서 가버린다. 졸지에 <꽃보다 누나>의 짐꾼처럼 되어버린 나는 내 방식대로 여유있게 올드 타운 속에다 말을 건넨다.
한참을 지났지만 우리 '누나'들은 그 자리다. 두 시간 동안 겨우 100미터쯤 이동시켰나? 그만큼 리가 올드 타운은 많은 볼거리를 내어주었다. 아니, 딱히 볼거리가 많았다기보다는 그날 그 분위기가 그랬을 테다. 먼저 간 두 사람이 다시 우리를 찾아와서는 끌끌 혀를 찬다.
금성에서 온 사람과 화성에서 온 사람의 여행은 분명 다른 법이다. 그렇게 자세히 오래 동안 구경했지만 여사들 누구 하나 1209년에 건설된 베드로 성당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림(Grimm) 형제의 동화 '브레멘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던 곳이라 하자 그제야 '아, 그 곳'이라고 합창한다. 그럼에도 리가의 올드 타운이 가장 좋았다고 입을 모으는 것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검은머리 전당(Melngalvjunams) 때문에 인상 깊었던 곳이다. 1344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2001년에 리가 800주년을 맞이해 전면적으로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건물 이름의 유래는 중세에 '검은머리 길드'가 이 건물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하는데, 이 길드의 수호신이 흑인 성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당 건물과는 또 다른 구조적 아름다움이 역사성과 어우러져 참신하다.
미국 서부 자동차여행을 하면서 우리를 지탱해주었던 과일의 위력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장을 보기 위해 리가 중앙시장(Rigas Centraltirgus)에 들렀다.
여느 재래시장과 다를 바 없는 정겨운 모습들이다. 자유여행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이러한 전통시장 방문이다. 과일 값이 생각보다 싸다. 한 아름씩 사도 2, 3 유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체리와 망고가 가장 맛있었는데, 복숭아와 멜론, 블루베리, 사과 등 일단 다양한 종류를 샀다.
치즈를 파는 가게가 유난히 많았다. 치즈의 맛이 이처럼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 날씨 때문에 상할까 걱정하면서도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를 한 덩어리 산다. 어떻게 갖고 가서 어떻게 먹을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다음 행선지 시굴다(Sigulda)는 리가에서 55Km 정도 떨어진 인구 1만 7000여 명 작은 시골 마을이다. 가우야 강과 접하고 제법 높은 언덕과 숲이 있어 라트비아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곳이다. 라트비아가 스키 선수가 많고 스켈레톤에서 세계 최강자 자리를 지키는 것은 이 도시 덕분이라 한다. 이곳의 관광 1번지는 1207년에 세워진 시굴다 성이 아니라 1214년에 세워졌다는 투라이다 성(The Castle of Turaida)이다.
투라이다 성은 1776년 화재로 피해를 입은 후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가 1988년에 이 성과 성 일대를 '투라이다 박물관지역'이란 이름의 보호구역으로 묶어 정비해 놓았다. 마침 비가 갠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성의 위용은 이곳이 왜 시굴다 최고의 명소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특히 30미터 높이의 망루에서 내려다보는 가우야 강과 공원 지역은 산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친근한 풍경이지만 산이 없는 이곳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일 듯했다. 잦았던 비가 다시 내려 우리는 한동안 성에 머물렀다.
뜻하지 않은 머뭄은 또 사색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래, 시간이 안 되면 유르말라는 패스하면 되지. 정해진 약속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게 고삐 없는 여행의 참맛이다.
에피소드 열아홉. 십자가 언덕 그래도 너무 늦게 출발했다. 유르말라는 패스한다 해도 다음 숙박지인 빌뉴스 가기 전에 샤울레이(Siauliai)는 꼭 들러야 하는데. 시굴다에서 족히 4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이다. 빗방울도 더욱 세차다. 대부분의 도로는 제한속도가 시속 70마일이다. 급한 김에 속도를 낸다. 그러나 렌트카는 시속 130킬로미터로 고정되어 있다.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시속 130km를 넘지 못한다.
왕복 2차선의 비 내리는 도로는 어두워지면서 시계를 흐리게 만든다. 차라도 많으면 앞 차를 따라가면 좋으련만 불빛이 나타나면 반가울 정도로 한산한 도로다. 내가 내는 속도 때문에 모두 걱정스러운 눈치이다. 조금 지나니 다행히 여사들은 모두 잠들었다. 샤울레이에 가까워지는데 우리가 갈 십자가 언덕은 이정표도 없다.
큰 정원이 딸린 길가의 레스토랑에 차를 세워 길을 물으니 지나쳐 왔단다. 차를 내린 김에 모두 화장실 볼 일을 보고 가벼운 몸으로 다시 출발을 한다. 어쨌든 화장실은 보일 때마다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우리 모두 충분히 알고 있는 터이다. 오죽했으면 '화장실 값이 물 값보다 많이 들었다'고 할까. 돈을 주더라도 자주 있기나 했으면.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어 한동안 가다보니 사진에서 보던 십자가가의 형체가 나타난다. 비 내리는 평일에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인지 매표소조차 인적이 없다. 차를 언덕 가까이 주차하고 우리들만의 관광을 시작한다. 이문열의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에 등장하는 박칼린의 사진 배경이 이곳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리투아니아 사람이었다.
샤올레이는 13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이고, 역사적으로는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연합군이 독일 검기사단과의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냈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별한 관광지가 없는데도 리투아니아를 찾은 관광객치고 이 곳을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바로 도시 외곽의 이 '십자가의 언덕'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야트막한 언덕 하나에 셀 수 없이 많은 십자가가 빽빽이 박혀 있는 언덕이다.
종교가 허용되지 않았던 소비에트 연방 시절, 언젠가부터 이 언덕에 십자가들이 박히기 시작했고, 당연히 소련군들은 매일같이 갈아엎었다. 갈아엎으면 엎을수록 십자가는 늘어만 가서 마침내 십자가의 언덕이 생겨나게 되었다. 좁은 언덕길을 따라 늘어선 크기도 모양도 모두 다른 십자가의 홍수에 정신이 아뜩해진다.
무슨 소망이 이렇게 많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소망의 크기나 모양도 각각 다르겠다. 이렇게 모아놓으면 '시너지' 효과라도 나는 걸까? 또 하나의 욕망을 보태는 일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소원을 내려놓을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이번 유행을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는 작은 소망 하나를 슬그머니 내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