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창조되면서 랑기누이와 파파투아누쿠(또는 랑기와 파파)는 줄곧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지냈지. 자식도 둘 사이의 아주 좁고 어두운 곳에 끼어서 자라도록 했어. 그런데 자식 중 '타네'라는 아들은 그 상황이 너무 싫었던 거야. 그래서 등을 아래로 하고 눕더니, 양다리로 랑기를 밀고 양팔로 파파를 밀어, 둘이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었지. 그 뒤 랑기는 하늘의 아버지가 되었고, 파파는 대지의 어머니가 되었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랑기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인 거야. - 본문 60-61쪽
주인공 앙투안은 어릴 적 '비가 내리는 이유'가 궁금해 화학자를 꿈꿨던 아버지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앙투안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너무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래서 앙투안은 나중에 아버지가 되면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비가 내리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그것이 위에 인용한 마오리족의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앙투안의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비가 내리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는다.
나는 어릴 적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저건 왜 그래요?"라는 말을 연신 입에 달고 다니던 나는 엄마에게 구박받기 일쑤였다. "그냥 봐. 뭘 그렇게 자꾸 물어보니. 보면 알게 돼." 어느 날 TV 속 인물의 말과 행동을 궁금해 하는 나에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그냥 보면 절로 알게 될 거라고.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뭔가를 자꾸 질문한다는 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부모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하다는 신호이다. 부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앙투안의 아버지도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다른 속사정을 염두에 둔다 해도 자식에 대한 무관심을 표출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앙투안의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심지어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아버지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사랑의 결핍을 느꼈던 앙투안은 자식들에게마저 소외된 채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은 어릴 적 가족 안에서 애정의 결핍과 소외를 겪으며 성장한 주인공 앙투안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그가 왜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외로움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설 속 앙투안의 가족은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다. 앙투안의 아버지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 화학자의 꿈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초록색 눈에 이끌려 결혼한 어머니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채 환상을 좇는다. 꼭 닮아서 한 몸 같았던 쌍둥이 여동생 안의 죽음으로 안나는 반쪽짜리 말을 하게 된다.
쌍둥이 여동생의 탄생으로 가족 모두에게 소외되었던 앙투안이 안의 죽음과 어머니의 부재로 안나와 연대하게 된 것은 역설적이다. 그들은 아버지에게조차 소외된 채 서로를 유일한 가족으로 끌어안는다. 앙투안이 안나의 반쪽짜리 말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안나가 자신과 꼭 닮은, 그래서 자신의 언어를 이해하는 토마를 만난 것처럼 앙투안 역시 그의 외로움과 애정의 결핍을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앙투안이 첫눈에 반해 결혼한 나탈리는 사랑에 열정적이었으나 앙투안의 어머니와 비슷한 부류였다. 앙투안의 어머니가 환상을 좇았다면 나탈리는 욕망을 좇았고, 그로 인해 가정을 등한시했다. 딸 조세핀과 아들 레옹이 태어났지만 앙투안은 여전히 가정 안에서 외로움을 느꼈고,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과 아버지의 종양, 갑작스런 실직과 이혼은 그의 삶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한 남자의 인생이 어쩌면 이토록 처절하게 불행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앙투안의 '위험한 선택'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부여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였겠으나 앙투안의 삶에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죽하면 그랬을까! 정도의 탄식이랄까.
자살하거나 타인을 죽이고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려는 욕망은 언제나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무한한 욕망, 상대방과 서로 마음을 합해 결국 상대방을 구원하려는 무한한 욕망과 만나 배가 된다. (본문 141쪽,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원주)
저자 역시 위 인용글을 통해 앙투안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앙투안, 그는 단지 자신과 아이들의 불행을 끝내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라 믿은 것이라고. 하지만 앙투안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딸 조세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비극적인 사건(앙투안이 조세핀의 턱을 총구로 겨냥한 일) 이후 앙투안과 조세핀이 회복되는 과정을 그려내는 후반부는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특히 조세핀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3부에서는 아버지가 벌인 끔찍한 일에 대해,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잊고자 하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을 먼저 쏜 이유가 뭔지 하나씩 답을 찾아 나가는 모습에 할 말을 잊게 된다. 그녀가 겪는 고통과 상처가 더욱 처절하게 와 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앙투안과 조세핀의 화해로 끝나는 소설적 결말이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유이다. 그들이 경험한 고통의 크기에 비해 화해와 치유의 과정이 너무도 '쉽게' 그려진다. 하지만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앙투안이 멕시코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치유되는 과정은 그가 겪은 불행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아저씨, 비는 왜 내려요?" 앙투안은 자기 아이들이 자신에게 물어주길 바란 그 질문을, 새로운 가족이 된 아르히날도에게서 듣는다. 덕분에 자신을 찾아온 조세핀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랑기와 파파이야기를, 그의 눈물에 담긴 슬픔과 함께.
저자의 최근작 <개인주의 가족>은 여러모로 이 작품과 많이 닮아있다. 가족 안에서 결핍을 느끼고 상처 받은 인물을 등장시켜 고통과 불행 속에서도 가족의 치유와 회복을 갈망하는 공통된 주제의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록 치유와 화해에 이르는 결말이 다소 극적으로 그려지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한계를 보이지만, 이는 끝까지 인간의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저자의 가치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삶의 진한 페이소스가 담겨있는 그의 소설은 수월하게 읽히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저자의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행복만을 보았다>(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문학테라피/ 2015년 2월 23일/ 1만3천8백원)
이 기사는 조진주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