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태풍의 눈' 정유라씨가 마침내 덴마크에서 체포됐습니다. 정씨는 각종 의혹에 대해서 "엄마가 다 했다", "나는 모른다"라고 발뺌했습니다. SNS에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고 말했던 정씨. 출석도 안하고 시험도 안 본 정씨에게 학점을 준 이대 교수님들. 우리 사회의 민낯에 청년들은 분노하기보다 허탈합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싣습니다. [편집자말] |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고3 수험생 류진호(가명) 씨에게 '정유라 특례 입학 사건'에 대해 묻자 그가 한 말이다. 부모 덕에 손쉽게 명문대에 들어가 봤자 어차피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거다. 진호 씨는 인터넷 유행어로 답변을 대신했지만 그에게서 깊은 체념의 정서가 느껴졌다. 울분을 토해내는 이도 있었다. 역시 고3 수험생인 강우민(가명) 씨는 "부모 잘못 만난 게 죄"라며 분노했다.
매해 수능 시험이 끝나면, 시험 성적을 비관한 수험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작년에도 충남 아산시에서 수험생 A군이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수험생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우리나라는 대입 경쟁이 치열하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 빽'으로 대학을 간다는 것은 모든 수험생의 노력을 무시하는 일이다. 노력을 무시당한 수험생은 화가 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체념'한다.
내가 만난 수험생들에게 '평등'이란 죽어야만 이뤄지는 것이었다. 삶에서의 평등은 포기한 듯했다. 급기야 화살은 애먼 부모들에게까지 돌아간다. 엄마가 당장 최순실이 되지 않는 이상 평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권력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없는 세상에서 평등이란 '죽창'뿐인 듯하다.
'태어나 보니 엄마가 최순실', 무슨 수로 이기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자녀의 교육수준을 좌우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가구소득, 아버지의 교육·직업수준이 자녀의 대학진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최상위 25% 구간에 속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4명 중 3명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갔고, 10%는 상위 9개 대학 및 의대에 입학했다. 반면 최하위 25%에 속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5명 중 2명만이 4년제 대학에, 0.4%만이 상위 9개 대학 및 의대에 들어갔다." - 이주영, <경향신문>, "부모 재력 = 자녀 학벌 '성공 사다리' 끊긴 한국" 중에서한국개발연구원(KDI)이 작년에 내놓은 '세대 간 계층 이동성과 교육의 역할' 보고서를 분석한 기사다. 이 보고서는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학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모의 재력은 '생득적 지위'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대학진학과 학벌이 정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노력하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교육 한 번 받은 적 없이 명문대 진학에 성공했다는 수험생의 미담 기사를 보면, 아직 이 사회가 노력한 자에게 보상을 준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유라 사건'은 이런 희망마저 사라지게 한다. 그야말로 '아무 노력 없이' 명문대 입학과 학점 취득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오로지 엄마인 최순실씨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기성세대는 줄곧 청년에게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청년 문제를 그저 청년이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돌리는 일이다. 기성 세대 본인들이 청년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인데 말이다. 그런 기성 세대에게 청년은 '노오력'이라며 비꼬았다. 그럼에도 개천에서 용이 되고자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 노력해도 안 되는 상대'를 만났다. 비선 실세의 자녀로 태어나 무소불위의 힘으로 모든 걸 이뤄낼 수 있는 이를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까. 계급 사회도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출세길이 정해지니 청년은 허탈하기만 하다.
'망할 새끼'의 씨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달라
정유라 씨는 이화여대 재학 중 제출한 리포트에 '해도 해도 안 되는 망할 새끼들에게 쓰는 수법'이라며 비속어를 사용했다. 또 2014년 자신의 SNS에는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라는 글을 게재했다. 짐작하건대 정씨에게는 뼛속 깊이 계급 의식이 자리한 것 같다. 재력과 권력을 거머쥔 부모를 만난 것이 곧 본인의 실력이고,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들은 '망할 새끼'다.
정씨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정씨를 제외한 대한민국 청년 대부분은 '망할 새끼'다. 부모는 비선 실세가 아니며 그만큼의 재력도 없고, 노력해 봤자 생득적 지위를 이길 순 없으니 말이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아니 '못 되는' 상황에서 청년은 '죽창'을 찾는다. 웃자고 하는 소리이지만 마냥 웃을 일이 아니다. "그냥 다 죽자"는 체념과 포기의 정서가 청년을 깊이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말 '망할 새끼'의 씨가 따로 있는가. 이 질문에 대놓고 "YES"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선 실세 의혹에 대해 해명 한 마디 내놓지 않는 정부를 보면 이 질문의 대답은 "사실상 YES"인 듯도 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신분제를 부활시키는 편이 낫겠다 싶다. '망할 새끼' 주제에 감히 명문대 입학과 좋은 학점 취득을 바라지 않고 타고 난 신분에 맞게 살도록 말이다. 어차피 안 되는데 애먼 노력을 쏟으며 시간 낭비할 일도 없지 않은가.
정부가 진정으로 청년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갖은 청년 정책을 쏟아내기 이전에 비선 실세 의혹에 대한 해명과 '정유라 사건'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청년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안 그래도 소득과 교육 수준이 대물림 되는 세상이다. '노력하면 된다'는 최소한의 희망마저 사라질 처지다. 청년은 더 이상 내몰릴 벼랑 끝도 없다. 정부는 하루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 '망할 새끼'의 씨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길 바란다. 그 전엔 청년 정책을 들이밀며 청년에게 노력하라고 요구할 자격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