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에 걸쳐 문화계 내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값과 지위 뒤에 숨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켰지요. 이렇게 실명이 공개된 유명인들의 사례 외에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폭력적인 언사나 행동은 문화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 책 <악어 프로젝트>(Les crocodiles)는 프랑스 여성들이 일상 속에서 경험한 '길거리 성폭력(street harassment)' 일화들을 만화로 그려 엮은 책입니다. 프랑스의 남성 만화가 토마 마티외가 여러 사람의 실제 경험을 취재하여 그린 것으로, 처음에는 인터넷에 공개되었는데 큰 반향을 일으켜 이렇게 책으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심각한 성폭력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행위부터, 어쩌면 다른 상황에서는 괜찮은 남자였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저지르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대형 서점 같은 공공 장소에서 여성에게 대놓고 보란 듯이 성기를 노출하거나, 대중 교통 수단에서 대놓고 몸을 만지작거리고, 새벽에 귀가하는 여성을 점 찍어 집까지 뒤쫓아 간 다음 밤새도록 그 앞에서 기다리며 자위 행위를 하는 것 등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의도적인 성폭력 행위입니다.
하지만 헤어진 남자친구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것을 두고 '네가 냉담하고 잔인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라며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거나, 머리를 기르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멋대로 단발로 바꿔 보라고 권유해서 자르게 한 다음 나몰라라 하는 경우처럼, 남녀 관계에서 힘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은 가해자가 나쁜 짓이라고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이지요.
소름끼치는 사례들 뒤에는 길거리 성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안과 유용한 조언을 담은 만화가 이어집니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사례 편과 마찬가지로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작화가 빛을 발합니다.
제목처럼 여기에 등장하는 남성들 - 그러니까 직접적인 가해자 뿐만 아니라 방관자들까지 - 은 모두 녹색 악어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그들을 '잠재적인 성적 포식자'로 느낀다는 것을 뜻하죠.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은 오직 여성들 뿐입니다. 이것은 책을 읽는 사람이 피해자인 여성의 입장에 보다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모든 남자를 그렇게 그린 건 심하다. 모든 남자가 잠재적인 성범죄자는 아니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서문에서 강조하듯 이 책의 목적은 모든 남자를 적으로 돌려 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인 여성이 실제로 느끼는 사회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공공 장소에서 성폭력을 당한다는 것이 여성들에게 이 정도로 소름끼치게 기분 나쁘고 무서운 일인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저도 아마 여성들에게 위협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면서도 그렇게 나쁜 일인지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공 장소에서 언어 또는 행동으로 성폭력이 가해지는 것을 목격했을 때,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가해자들이 마음 놓고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적도 있었겠지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책은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를 성폭력이라고 싸잡아 말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도 기준이 있습니다. 여성이 '싫으니 그만하라'고 했을 때, 바로 그만 둘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분명히 싫다는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폭력이니까요.
성폭력을 저지른 남자들은 이렇게 얘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이제껏 살아 온 삶이 원래 좀 그랬어. 그냥 나쁜 뜻은 없었는데, 네가 불쾌했다면 사과할게'라고요. 그런데 이것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본능이나 스스로의 자연스런 생활 방식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지속적인 재교육이나 치료 등 정상적인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만약 그게 그렇게 어렵고 힘들어서 넘치는 본능을 주체할 수 없다면 그냥 동물원이나 혹은 야생으로 돌아가서 다른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어느 나라, 어느 집단에나 존재하는 성폭력. 이것을 줄여 나가기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책 <악어 프로젝트>는 그런 노력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뿐만 아니라, 건강한 남녀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기본 태도를 가르쳐 주는 필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악어 프로젝트>,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 푸른지식(2016. 6. 1.)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