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토요일. 난바역 근처로 숙소를 옮기는 날이다. 종혁씨의 허리 상태가 악화되어 오늘 하루는 천천히 보내며 쉬기로 했다. 두 번째 숙소는 원룸 형태로 온전히 우리 둘만 쓰는 독립된 아파트였다. 한 군데서만 머물기보다 다양한 곳에 있어보고 싶어서 고른 숙소다. 사흘에 12만 원이 조금 넘으니 안나네 집보다 비싸지만, 여행자들의 핫플레이스인 난바역 근처에서 이정도면 정말 저렴한 가격이다.
집주인은 비슷한 집을 여러 채 보유하고 여행자들에게 방을 빌려주는 임대업자인 듯싶었다. 우리는 집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주인은 인근 지리를 잘 몰라서 서로 한참을 헤맨 끝에 사람을 만나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허리 지압을 해주었더니 종혁씨는 그대로 낮잠이 들고, 나도 옆에 누워 잠깐 졸았다. 슬슬 저녁때가 되어서 옷을 갈아입고 여행자의 천국이라는 난바와 도톤보리 구경에 나섰다.
오사카 '인증샷'을 찍는 포토 스팟인 에비스바시 위에서 유명한 글리코 간판 아저씨를 배경으로 한 컷. 밤이 되어 더욱 화려해진 네온사인이 가득한 주변은 온통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수많은 식당과 상점이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과자와 잡화 등을 파는 드럭스토어가 유난히 많았다. 취급하는 물건들은 일본 물가에 비해 값이 싼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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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톤보리 최대 중심가 '에비스바시'는 매일 밤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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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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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가장 유명한 상점이 '돈키호테'인데 7, 8층짜리 건물 전체에 물건이 가득 차있다. 우리도 조금 구경을 하다가 필수 쇼핑리스트 중 하나라는 '휴족시간(休足時間)' 파스를 하나 샀다. 발에 붙이는 파스인데 마침 발이 몹시 피곤하던 차에 요긴하게 썼다. 피곤한 발이나 다리에 붙이는 순간 시원한 쿨링감이 느껴지고, 시간이 지나면 뜨끈뜨끈 열감이 올라오면서 아픈 부위에 찜질 효과를 준다.
이 드럭스토어 물건들 중에는 휴족시간이 대표상품인 모양이다. 몇몇 상점들에서 점원이 손간판을 들고 나와 자기네 가게에서 파는 휴족시간의 가격을 홍보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느 건물 5층쯤에서 이 휴족시간의 가격을 써 붙인 대형 손간판을 들고 춤을 추다시피 좌우로 흔들어대는 모양을 보고 한참을 웃기도 했다.
계속 걷다보니 인터넷 블로그에서 봤던 맛집들이 여기 다 모여 있다. 이치란 라멘, 치즈타르트 카페 파블로 등등. 이치란 라멘은 엄청난 줄을 보는 순간 바로 포기했고, 파블로는 줄이 짧아서 10여 분 기다렸다가 대표상품인 치즈타르트 한 개를 샀다. 포장 판매가 더 저렴한 관계로 카페 2층은 자리가 넉넉한데 포장 손님만 줄을 섰다.
치즈타르트는 구운 정도에 따라 '레어'와 '미디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적당히 구워진 미디움보다 치즈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양이 먹음직스러운 레어를 골랐다. 주문을 받은 직원은 '냉장고에서 이틀, 상온에서 여섯 시간 보관 가능하다'고 영어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다음날 아침에 커피와 함께 먹어보니 순두부처럼 말랑말랑한 치즈가 입안 가득 진한 풍미를 선사했다. 겉을 둘러싼 파이도 바삭하고 고소했다.
타르트를 포장해 들고 다시 걷다가 긴 줄을 선 타코야끼 가게를 발견했다. 간판에 엄청나게 큰 문어 모형이 버티고 있는 이 가게의 이름은 쿠쿠로. 여기도 역시 줄을 선 것은 포장 손님이고, 가게 안은 자리가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종혁씨가 좋아하는 타코야끼를 이날의 저녁 메뉴로 정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메뉴를 살펴보니 타코야끼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기본 타코야끼와 뜨거운 국물과 함께 나온다는 '아카시야끼'를 각각 하나씩 시켰다. 다른 가게의 두 배 가격이었지만 과연 맛이 달랐다. 입 안 가득 알차게 씹히는 싱싱한 문어 살. 여태껏 먹었던 모든 타코야끼들이 한낱 밀가루 빵으로 전락하는 순간.
뜨거운 가쯔오부시 국물에 담가 먹는 '아카시야끼'도 정말 새로운 맛이었다. 밀가루가 아니라 계란찜 같은 부드러운 피가 문어를 둘러싸고 있다. 채 썬 생강과 참나물이 곁들여 나왔는데, 참나물을 국물에 띄워 함께 먹으니 향이 더욱 특별했다.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판에 500엔'이라고 쓰여 있는 'CONA 피자'라는 비스트로를 발견했다. 밤늦게 또 무엇을 먹는 게 망설여졌지만, 여행 분위기에 취해서 종혁씨에게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맥주 한 잔과 반반 피자 한 판. 모든 메뉴가 한 판에 500엔이고, 서로 다른 종류를 반반 시키면 600엔이다. 크기는 한국의 레귤러 피자 사이즈 정도.
블랙올리브와 앤초비가 들어간 피자와 짭짤한 돼지고기 햄에 토마토를 얹은 피자를 반반 주문했는데 두 가지 다 아주 맛이 있었다. 이렇게나 저렴한 가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결국 다음날 저녁에도 다시 이 가게를 찾았다. 두번째에는 고르곤졸라 피자와 채식 피자 각각 한 판, 그리고 특별 세일 중인 전채요리 메뉴를 선택했다.
세상에,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780엔짜리 전채요리는 베이컨으로 감싼 매쉬드 포테이토와 훈제 연어 샐러드, 겉면을 살짝 익힌 쇠고기 몇 점, 새우와 타코와 갖은 채소를 올리브유에 버무린 새콤짭짤한 샐러드 등 네 가지가 한 접시에 나왔다. 주인장의 음식에 대한 감각과 정성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 집 주인은 제대로 된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 갓 서른쯤 되었을 것 같은 젊은 사장에게 음식 칭찬을 했더니 수줍게 웃는다. 벽에 걸린 특이한 그림은 친구가 직접 손으로 그린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해주었다. 전 세계 여행이 취미라는 이 사장은 특이하게도 영어를 전혀 못했다. 하지만 손에 든 휴대폰 앱으로 즉석에서 일어를 영어로 번역해주었기 때문에 음식 주문이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와인도 가격이 무척 저렴하다. 불과 2000엔 정도에 칠레산 쉬라즈 한 병을 주문해서 마셨다. 일본은 수입 주류의 값이 무척 싸다. 슈퍼마켓에서는 1000엔 정도면 괜찮은 와인을 한 병 살 수 있다. 한국처럼 엄청난 '주세 폭탄'이 없기 때문이다.
두 끼의 저녁식사. '일본의 부엌'이라는 오사카에서 우리도 '구이다오레(食い倒れ, 지쳐 쓰러질 때까지 먹는다)'를 해본 셈인가.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와 단잠을 청했다. 독립된 공간이라 좋기는 한데 방이 꽤나 좁다. 욕실은 크기나 구조가 비행기 화장실과 비슷했다.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심지어 미니 사이즈의 욕조까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atree12fly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