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은 이성적 논리보다는 순발력과 감(感)으로 정치를 했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어록대로, 머리 좋은 참모를 데려다 쓰면 된다는 지론이었다. 문제는 머리 좋은 사람을 골라 쓰는 일에, 별로 머리가 좋지 않은 아들 김현철씨와 사조직이 개입한 것이었다.
김현철씨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나라사랑운동본부(나사본)라는 외곽조직을 만들었다. 김씨의 30년 친구인 박태중이 조직 가동에 돈을 댔다. 이권개입(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 박태중씨는 나중에 발표한 비망록에서 "김영삼 후보로부터 직접 400억 원 이상을 받아 나사본에 나눠줬다"라고 공개했다. 김씨는 쓰고 남은 대선 잔금 120억 원을 받아 관리하며 '나사본'외에도 막후 비선조직인 동숭동팀(전병민)과 언론-정책 모임으로 광화문팀(김원용 교수)을 운영했다.
김씨는 문민정부 출범 후에도 '중앙여론조사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했다. 별다른 공식 직함이 없는 김씨는 '여의도 김소장'으로 통했다. '여의도 김소장'은 '소통령'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사정을 지휘할 때, 아들은 기업으로부터 '활동비'를 받아 강남의 고급 룸살롱 '지안'에서 측근들과 어울리며 국정을 농단했다. 시간이 갈수록 김씨와 선을 대려는 정치꾼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고, 그의 책상에는 이력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김씨도 시중의 여론을 정확히 파악해 아버지에게 가감없이 전달함으로써 국정을 보좌하겠다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김씨는 '한보사태'로 구속되기 전까지 4년간 기업들로부터 '활동비'를 걷어 여론조사비로 50억 원 이상을 썼다. 여론조사비만 월 평균 1억 원 이상이었다. 김씨도 처음에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안기부의 '대통령 일일보고'를 오정소 대공정책실장과 김기섭 기조실장 라인을 통해 대통령보다 먼저 봤다.
정권 말기 현철씨 이름이 각종 비리사건에 오르내리더니 1997년 한보그룹이 부도나면서 '한보 게이트'가 불거졌다. 언론은 "현철씨의 비리혐의는 단순한 인척정치 해악의 수준을 넘어 총체적 조직적 국정문란 사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라고 질타했다. 김씨는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아들의 전횡을 막지 못한 대통령은 참담한 표정으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결국 김 대통령은 사조직의 국정농단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다가 IMF 환란을 맞이했다.
국정농단, 20년 만에 대한민국을 흔들다대통령 사조직의 국정농단이 20년 만에 다시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아무런 공직을 맡은 바 없는 최순실씨가 대통령의 연설문과 국무회의 말씀자료 등을 미리 받아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JTBC에 따르면, 최씨의 태블릿PC에는 대통령 연설문 및 말씀자료가 44개 있었다. 최씨는 일본 특사단 면담 시나리오 같은 민감한 외교 문건도 접견 9시간 전에 받아본 것으로 드러났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다던 해괴한 일이 21세기 청와대에서 벌어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최씨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연설-홍보-메시지 등 국정운영의 상당 부분을 사조직에 의존해 왔음을 '자백'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 태도와 수위를 보면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마지못해 한 '어물쩍 사과'라는 느낌이 역력하다. 그래서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이라는 대통령의 해명에서 '불순한 마음'을 읽은 국민의 분노는 탄핵과 하야를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청와대에서 생산된 문서는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된다. 청와대 직원들은 컴퓨터에서 개인 전자우편을 사용할 수 없게 돼 있다. 사무실에서 작업한 문서를 이동식저장장치(USB)에 저장하는 것도 안 된다. 업무상 청와대 공식 전자우편 계정을 통해 외부인에게 이메일을 보낼 경우에는 청와대 전산팀 사이버 보안 관련 부서에 소명해 전송 내역을 확인토록 돼 있다.
대통령령인 보안업무규정과 대통령훈령인 보안업무규정시행규칙에 따르면, 국정원장은 국가보안시설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안측정과 보안감사 그리고 보안사고 조사를 하게 돼 있다. 그런데 '빨간펜'으로 수정한 흔적이 있는 드레스덴 연설은 남북관계의 로드맵을 담은 비밀 문건이다. 발표 전까지 극비로 다뤄져야 할 극비사안이 한 민간인의 빨간펜으로 수정됐다는 건 국가보안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국가보안 시스템에 구멍 뚫은 장본인... '박근혜'
이 국기 문란 사건의 심각성은 국가보안 시스템에 구멍을 뚫은 장본인이 대통령이라는 데 있다. 드러나는 정황을 보면,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호성 비서관이 대통령 몰래 청와대 문건을 최씨에게 전달했을리는 없다. 물론 대통령은 헌법상 내란이나 외환의 죄를 제외하고는 임기 중 형사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통령 지시를 받아 문건을 유출한 청와대 관계자에 대한 수사는 가능하다. 이들에 대한 유죄가 확정되면, 대통령 임기가 종료됨과 동시에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도 가능하다.
박 대통령에게 적용되는 범죄혐의는 공무상 비밀누설죄와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의 죄, 두 가지다. 우선, 형법 127조는 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자가 직무상 비밀을 누설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년 이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일부 자료를 넘겼다고 '자백'했다. 드레스덴 연설처럼 '통일 대박'이라는 대북정책 기조를 담은 집행 전의 구상은 비밀로 보호할 가치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공무상 비밀누설죄에 해당된다.
판례에 따르면 직무상 비밀은 반드시 법령에 의해 비밀로 규정됐거나 비밀로 분류·명시된 사항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정치·군사·외교·경제·사회적 필요에 따라 비밀로 된 사항은 물론, 정부나 국민이 객관적·일반적 입장에서 볼 때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것으로서 상당한 이익이 있는 사항도 포함된다. 2014년 청와대 민정 라인의 보고서가 유출된 정윤회 문건 사건으로 기소된 박관천 경정(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의 경우, 1심과 2심은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는 유죄로 판단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은 대통령기록물을 '대통령(대통령 권한 대행 및 당선인 포함)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 대통령 본인이나 보좌·자문·경호기관이 생산·접수·보유하는 기록물 및 물품'으로 정의한다. 이를 무단으로 유출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연설문은 대통령 당사자 또는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 등 보좌진이 대통령 직무 수행과 관련해 작성한 것이기에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판례에 따르면, 법원은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여부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이나 '정윤회 문건 유출'과 관련해 기소된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게 대표적이다.
"비선, 숨은 실세 보도... 나라 흔들지 말라"더니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관련 자료가 대통령의 수정 지시가 내려진 초본에 불과하고 '생산이 완료된 문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에선 여기에 더해 대통령기록물이 문서의 원본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추가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 문건 내용보다 청와대 문건이 외부에 유출된 사실에 초점을 맞춰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로 규정해 이렇게 반박했다.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을 관련자들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비선이니 숨은 실세가 있는 것 같이 보도하면서 의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선진국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에는 이런 근거 없는 일로 나라를 흔드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런데 비서실장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하고, 박 대통령이 본인의 입으로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라고 규정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래서 '최순실 게이트'는 '김현철 게이트'보다 더 충격적이고 엽기적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은 많은 국민을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뜨린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의 유력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국무장관 시절 사적 이메일을 사용한 혐의로 FBI(연방수사국) 조사를 받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재임 중 실수로 CIA 공작원 이름을 언급해 자청해서 보안누설 경위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국정원 소관인 보안업무시행규칙에 따르면, 보안사고나 보안누설로 인한 조사대상에는 국정원장이건 대통령이건 예외없이 적용된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형사소추 목적의 수사가 아닌 보안시스템 유지를 위한 보안누설 조사는 박 대통령도 예외없이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JTBC의 추가보도에 따르면, 최씨의 태블릿PC에서 남북한 군당국 비밀접촉 시나리오 문건도 발견되었다. 이는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소지가 큰 중대 사안이다. 이종찬 전 원장은 "최순실씨가 민간인이지만 그의 태블릿PC에서 국가기밀 문건들이 발견된 이상, 국정원은 당장 최씨의 신병을 확보해 북한 공작원들이 최씨를 유인·납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드러나는 양상을 보면, 김현철 게이트와 최순실 게이트는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여의도 김소장'이 여의도 중앙여론조사연구소와 룸살롱 '지안'에서 정·재계 인사들을 만났다면, '논현동 최회장'은 논현동의 카페 '테스타로싸(TestaRossa, 빨간 머리)'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는 '아지트'로 활용했다고 한다.
성난 민심의 추이도 비슷한 양상이다. 김현철 게이트로 김영삼 정부 5년차 지지율은 한 자릿수(6%)까지 떨어졌다. '여의도 김소장'이 아버지를 위해 4년 동안 월평균 1억 원이 넘는 돈을 써가며 여론조사를 한 결과라고 믿기에는 황당한 반전이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처음으로 10%대(17.5%, 10월 26일 리얼미터)까지 떨어졌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해의 지지율과 비슷한 곡선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악재를 더 큰 뉴스로 덮으려는 것도 무능한 정권의 고전적 수법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안기부는 한보 사태와 김현철 게이트를 황장엽 망명 사건으로 덮으려 했다(김당, <시크릿파일 국정원> 참조). 혹시라도 그때처럼 개헌으로 국면 전환을 해 국기 문란을 어물쩍 덮으려 한다면 오산이다. 현재 국회의 개헌 찬성 의원은 재적의원의 2/3에 육박한다. 국회의 개헌 의결 정족수와 대통령 탄핵 의결 정족수는 같다. 개헌하려다가 탄핵을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필자는 지난 2월 박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개성공단 폐쇄결정을 내린 직후에 '최악의 대통령을 만났다, 불행하게도'(
http://omn.kr/hy4i)라는 칼럼에서 "나라를 하루아침에 전쟁의 동굴 속으로 몰아넣고도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른 채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불행하게도 우리는 어쩌면 최악의 '역대급 대통령'을 만난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그로부터 10개월 만에 역대급 하나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대통령이 한 선무당에 조종당한 '역대급 아바타 정권'을 만났다.
김영삼이 국가부도로 국가경제를 무너뜨렸다면, 박근혜는 국기 문란으로 국민의 영혼을 '결딴'냈다. 김영삼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자신을 제명하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록을 남겼다. 박정희 딸에게는 '칠푼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왜 그런 비판과 독설을 했는지 이제 와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박정희가 비명횡사한 10월 26일이 지나고, 우리는 지금 국민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나라가 바로 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