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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랴쇼몽>(1950), <7인의 사무라이>(1954), <카게무샤>(1980), <란>(1985)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다수 제작한 거장이다. 1990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할 정도로 세계 영화사에 큰 업적을 남겼던 그의 작품 중 특히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는 몇 번을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영화 <카게무샤>도 그에 못지않다. 아키라 감독에게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준 이 작품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였던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군주 신변을 보호하는 대역 '카게무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카게무샤'는 우리 말로 그림자 무사라는 뜻이다. 영주를 대신하는 대역일 뿐이니 어디까지나 가짜 군주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카케무샤> 포스터
영화 <카케무샤> 포스터 ⓒ 20세기 폭스사

아키라 감독은 영화 <카게무샤>를 통해 군주의 그림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카게무샤'의 삶을 비장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 자막이 올라가면 비장함은 이내 허무함으로 전이된다. 실체없는 그림자의 삶을 살았던 '카게무샤'의 모습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가케무샤'가 군주의 신변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에 불과했듯 우리도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그림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도 이 정도는 아니다

온 나라가 시끌벅적 난리다.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이 사실로 밝혀지면서부터다. 전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14년 이른바 '정윤회 문건'이 유출되면서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의 실체가 드러났고, 비선실세의 국정개입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대통령의 서슬 퍼런 진노 속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런데 애초 이 사실을 청와대에 보고했던 박관천 전 행정관은 내부 문건 유출 혐의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가 정윤회, 3위가 대통령"이라고 밝혀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 당시 최순실씨는 철저히 베일 속에 가려진 존재였다. 세간의 모든 시선이 정윤회씨와 문고리 3인방에게 쏠려 있었던 탓이다. 최순실씨는 단지 정윤회씨의 전 부인 정도로 알려졌을 뿐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모두가 감쪽같이 속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에 불과한 '카게무샤'를 군주라고 믿고 있었던 과거의 그들처럼.

딸 마장마술 경기 지켜보는 최순실과 정윤회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실장인 정윤회(왼쪽)씨와 전 부인 최순실씨가 2013년 7월19일 경기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딸이 출전한 마장마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딸 마장마술 경기 지켜보는 최순실과 정윤회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실장인 정윤회(왼쪽)씨와 전 부인 최순실씨가 2013년 7월19일 경기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딸이 출전한 마장마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사진제공 한겨레

그러나 수면 아래로 잠기는 듯했던 최순실씨의 이름은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 의혹이 세상에 불거지는 과정에서 다시 부상하게 된다. 조선일보와 청와대가 우병우 수석 문제로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TV 조선이 청와대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이 개입되어 있는 미르재단 자금모금 의혹을 보도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자금모집 과정에 외압설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최순실씨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후의 상황은 모두가 아는 바다. 한번 물꼬가 터지자 관련자 증언과 진술, 또 다른 의혹들이 봇물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순실씨가 청와대로부터 매일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를 건네받아 검토했다는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의 증언이 나왔고, 안종범 수석이 "SK를 찾아가 80억원의 투자금을 요구했다"는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의 증언까지 나왔다. 그동안 안종범 수석은 재단모금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완강히 부인해 온 터였다.

최순실씨의 PC와 관련해서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최순실씨 PC는 법인 명의로 돼 있는데 그 대표가 현 김한수 청와대 뉴미디어실 선임행정관으로 밝혀진 것이다. 결국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김한수 행정관이 최순실씨에게 관련 자료들을 건네주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순실씨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이 우후죽순처럼 드러나고, 절대 권력의 붕괴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는 이상 권력이탈 현상은 앞으로 더욱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다. 최순실 특검에 전격 합의한 여당과 여당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강성 발언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권력이반은 이미 시작됐다.

가장 큰 의문은 역시 최순실씨의 실제 역할이다. 애초 의혹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청와대의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항변조차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었다. 일반인에 불과한 최순실씨가 대통령 위에서 국사를 좌지우지한다는 설정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최순실 섭정' 소문... 국민은 부끄럽다

"하야! 하야!" 요구하는 청년들 지난 26일 오후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앞에서 열린 2016청년총궐기 추진위 주최 ‘박근혜 하야 촉구 분노의 버스킹’에서 참석자들이 다양한 모양의 피켓을 들고 나와 ‘비선실세’ 최순실 게이트 관련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하야! 하야!" 요구하는 청년들지난 26일 오후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앞에서 열린 2016청년총궐기 추진위 주최 ‘박근혜 하야 촉구 분노의 버스킹’에서 참석자들이 다양한 모양의 피켓을 들고 나와 ‘비선실세’ 최순실 게이트 관련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 권우성

그러나 이제는 어떤 소설을 쓴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최순실씨의 국정개입은 대통령의 해명과는 달리 조언이나 참고의 수준이 아니었다. 이성한 전 총장의 증언에 따르면 최순실씨의 지시대로 청와대 비서실이 움직였고 사업계획서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심지어 그는 최순실씨가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하면 대통령은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말이 맞다면 대통령은 최순실씨의 꼭두각시이자 '카게무샤'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성한 전 총장의 증언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미 드러난 정황만으로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관계는 상식을 초월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 기밀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납득할 수 없는 해명으로 본질을 비켜 가려 하고 있다. 대통령의 안일한 상황인식이 국가와 국민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이번 사건을 달리 헌정사상 최악의 국기문란 사건이라 칭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도 '최순실' 저기도 '최순실', 온 나라가 온통 '최순실' 이야기뿐이다. 급기야 최순실씨가 대통령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는 흉흉한 얘기마저 떠돈다. 황망한 것은 이 황당무계한 소리가 괴담이나 유언비어가 아니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관련 증거들은 대통령의 자질과 자격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대통령은 정말 '최순실'의 '카게무샤'에 불과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공화국과 국민의 자존감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국민은 묻고 또 묻는다. 도대체 이게 국가인가?


#최순실 박근혜 #박근혜 최순실 의혹 사과#박근혜 녹화사과#비선실세 국정농단#대한민국 권력 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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