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일요일. 또다시 하루짜리 오사카 주유패스를 쓰는 날. 주유패스는 정해진 기간 동안 제휴를 맺은 수십 군데의 관광지 중 원하는 곳을 무제한으로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본전을 뽑으려면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오늘은 주말만 탈 수 있다는 돔보리 재즈 크루즈와 산타마리아 트와일라잇 크루즈를 타기로 했다.
관광안내서를 보니 돔보리 재즈 크루즈는 11시부터 티켓판매소에서 선착순으로 접수한다고 한다. 산타마리아 트와일라잇은 시간에 맞춰 현장에 도착하면 되는 것 같다. 일단 아침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하철 한 구간 거리인 쿠로몬 시장에 갔다.
주유패스를 쓰는 날은 지하철과 버스 승차가 무제한이라 많이 이용할수록 유리하다. 쿠로몬은 한자로 흑문(黑門), 그러니까 검은 문 시장이다. 손님의 대부분이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이다. 파는 물건 역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먹을 것이었다.
온갖 종류의 싱싱한 생선은 물론이고 얼음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대게 다리, 사시미, 초밥 등 수많은 먹을거리가 행인들을 유혹했다. 물건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게 조리해준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갖추고 있었다. 즉석에서 튀긴 고로케나 덴뿌라를 파는 가게도 많았고, 고베에서 나는 일본산 소고기인 고베규를 구워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생 우니(성게알)를 파는 가게에서는 시커먼 가시가 성성한 성게를 즉석에서 까주었다. 큰 성게 한 마리를 먹기 좋게 깐 다음 냉동 우니를 추가로 듬뿍 얹어 준다. 그래봤자 양은 한 줌 정도지만 가격은 한 개에 2천엔. 역시 한옆에 놓인 테이블에서 간장 소스와 함께 바로 먹을 수 있다.
장갑도 안 낀 맨손으로 성게를 쥐고 핀셋으로 세심하게 껍질을 까는 모습은 그 자체가 구경거리였다. 진지하게 일에 몰입한 주인 아저씨를 둘러싼 구경꾼들이 그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어제 산 파블로 치즈타르트를 아침식사로 잔뜩 먹고 왔지만, 결국 비프 고로케 하나와 고베규 꼬치 하나를 또 사먹고 말았다. 소고기 세 조각이 끼워진 꼬치 한 개에 천 엔. 일본 와규 역시 한우만큼이나 값이 만만치 않다. 서둘러 시장을 나오면서 쯔게모노(단무지 같은 채소 절임) 꼬치 하나를 더 사서 맛있게 입가심을 했다.
11시가 되기 전에 도톤보리의 크루즈 선착장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티켓판매소 앞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줄이 길지는 않았다. 우리도 얼른 줄을 섰다. 햇볕 내리쬐는 한낮의 도톤보리 강. 천변에는 주말을 맞아 벼룩시장이 열렸다. 티켓판매소가 오픈하기를 기다리며 둘이서 교대로 벼룩시장을 구경했다.
분홍과 하늘색 파스텔톤의 술이 달린 맘에 쏙 드는 귀걸이가 800엔이었는데, 내게 알러지를 일으키는 니켈침으로 되어 있어서 아쉽게 포기했다. 면에 천연염색한 실내용 원피스류가 천 엔, 심지어 백 엔짜리 인도산 면직 원피스도 있었다. 괜찮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벼룩시장의 매력이지.
종혁씨가 사주겠다며 권해서 천 엔짜리 원피스를 옷 위에 입어봤으나, 내게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서 도로 내려놨다. 재즈 크루즈는 다행히 원하던 저녁 시간에 예약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일단 숙소에 들렀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자 말로만 듣던 오사카의 더위가 엄습했기 때문이다. 9월말인데도 한여름 같았다.
방에서 에어컨을 틀고 잠시 쉬었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쿠로몬 시장 슈퍼마켓에서 산 인스턴트 밀크티를 한 잔씩 마셨다. 이제 어딜 갈까. 주유패스 안내서를 보면 갈 곳은 널려있지만 특별히 끌리는 데가 없다. 종혁씨가 낮의 우메다 공중정원에 다시 한 번 올라가보자고 해서 그리로 길을 나섰다.
우메다 전철역 앞에서 손님이 붐비는 라멘 집을 발견하고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종혁씨는 된장 베이스의 소유라멘, 나는 라멘의 대표인 돈코츠라멘을 주문했다. 기왕이면 대표 음식을 먹어봐야지, 하면서. 하지만 결국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소유라멘은 먹을 만했으나 돈코츠라멘은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으로 뒤덮인 진하디 진한 돼지뼈 육수는 돼지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한 모금 삼키기도 어려웠다. 돼지 편육도 큼지막한 놈으로 넉넉히 올려져 있었으나 한 조각을 먹고 나니 나머지에 젓가락을 댈 마음이 사라졌다.
국물 몇 숟갈 뜨고 국수만 대충 건져 먹고 나머지는 남기고 말았다. 유일하게 맛있게 먹은 것은 노른자에 빠알간 빛이 도는 잘 삶아진 계란 반숙 고명이었다. 제대로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추가 비용을 주고 '특'으로 주문했는데, 이럴수가.
그야말로 돼지 냄새를 질리도록 뒤집어쓴 점심 한 그릇이었다. 정작 일본인들은 그 집 음식이 맛있는지 가게 안은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다. 앞으로 '정통' 일본식 라멘은 먹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하나 배웠다. 천 엔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주고.
근처에 있는 헵파이브를 먼저 타고 우메다 스카이 빌딩 전망대에 올랐다. 낮에 보는 오사카 전망도 멋지다. 도시 전체에 거미줄처럼 뻗은 강과 다리들이 밤보다 더 잘 보였다. 이렇게 강이 많으니 전철역 이름이 죄다 ○○바시(橋, 다리)이다.
야외 전망대에서 내려와 카페 옆 테이블에서 그 유명한 '도지마롤'을 먹었다. 아까 한큐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 몽쉐르 지점을 발견하고 사온 것이다. 물론 줄을 좀 서야했다.
지난번 밤에 왔을 때는 몰랐는데 맨 꼭대기 층 벽면에 '오늘의 일몰 시각'이 표시되어 있다. 알고 보니 이 전망대는 석양과 노을 풍경이 특히 유명하단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여행자는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다섯 시 반 도톤보리 재즈 크루즈까지 두어 시간이 남았다. 재빨리 신세카이(新世界)에 있는 츠텐카쿠로 출발.
'하늘과 통하는 집'이라는 뜻의 '통천각(通天閣)'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츠텐카쿠는 화재로 소실된 후 1956년 재건립 당시 오사카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였다.(높이 100미터) '신세계(新世界)'라는 이름이 붙은 주변 거리는 오사카 최대의 번화가였으리라.
건물 안에는 당시의 영광을 증언하는 사진과 모형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6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관람객 수도 예전 같지 않고, 주변 상가는 쇠락해 쓸쓸한 느낌마저 풍긴다.
한때 번성했을 법한 오래된 시장 골목은 오가는 행인이 거의 없어 조용했다. 문을 닫은 가게도 꽤 많았다. 츠텐카쿠 안에 들어가니 전망대 내부가 너무 작아서 아래층에서 30분 이상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아기자기한 볼거리로 꾸며놓은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오랜 세월 오사카의 상징으로 통했던 츠텐카쿠는 수많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다. 츠텐카쿠가 등장한 만화 장면이나 만화 캐릭터들을 그림과 모형으로 전시해놓은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에펠탑을 닮았다는 이 전망대는 어쨌든 수십 년 동안 오사카 시민들의 자랑이었던 것이다.
바쁘게 츠텐카쿠를 나와 다시 난바의 돔보리 재즈크루즈 선착장으로 향했다. 오후 햇볕이 사그라드는 선착장에 배가 낮게 떠 있었다. 배를 탈 때 한 사람당 기린 맥주 한 캔과 탬버린 종류의 악기 하나씩을 나눠준다. 기린 맥주는 재즈크루즈의 후원사다. 신나는 공연을 즐기기 위한 준비물인가. 잠시 뒤 있을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높아진다.
20인승쯤 되는 크지 않은 배에 탄 손님은 모두 여덟 명. 이윽고 트럼펫과 오보에, 만돌린, 튜바로 구성된 4인조 밴드가 탑승해 자리에 앉았다. 돔보리 재즈크루즈 출발! 넷 중 홍일점인 여성 트럼펫 연주자가 해설 겸 진행도 담당했다. 쾌활하고 부드럽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진행에 편안하게 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다.
연주는 대부분 귀에 익은 올드 재즈곡들. 하지만 녹음된 곡과 눈앞에서 연주하는 라이브 곡의 감동은 천지차이다.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연주자들은 맡은 바 연주에 정성과 성의를 다했다. 비록 재즈 소품들이었지만 가슴을 울리는 명연주였다.
그 정성이 고마워서 우리도 탬버린을 흔들며 열심히 화답했다. 노을이 지는 도톤보리 강을 유유히 흐르는 배. 주변 상가들의 화려한 불빛.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재즈 선율.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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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둑해지는 도톤보리강을 유유히 흐르는 유람선과 재즈 선율은 잊지못할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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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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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분의 크루즈 투어가 끝나고, 진심어린 감사 인사를 나누고, 다음 행선지인 오사카항으로 내달렸다. 이번에는 7시 산타마리아 트와일라잇 크루즈를 타기 위해서. 참 숨가쁜 하루다. 시간이 빠듯했다. 과연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서둘러 난바역에서 전철을 타고, 아와자역에서 서둘러 환승을 하고, 오사카항 역에 내려서는 숨이 차도록 달리기를 했다.
다행히 7시 이전에 덴포잔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날 트와일라잇 크루즈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안내 책자 하단에 '대절이나 이벤트의 경우에는 운휴'라고 작게 쓰여 있는 것을 자세히 보지 못한 탓이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에 상륙할 때 탔던 배를 두 배 크기로 복원했다는 산타마리아호는 선착장에 서 있었으나, 그 배를 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이날 배를 통째로 빌린 파티 손님들이 차례로 승선 중이었다. 더구나 트와일라잇 크루즈 시간도 6시 반이었는데 우리는 7시로 잘못 알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산타마리아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치 배를 탔던 것처럼(?). 근처까지 왔으니 덴포잔 대관람차를 타고 오사카항의 야경을 다시 한 번 구경하고, 가이유칸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동양에서 제일 큰 수족관이라는 가이유칸도 갈까 말까 많이 고민했던 곳인데.
다시 난바역으로 돌아와 'CONA 피자'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밤부터 소나기가 오더니 밤새 많은 비가 내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blog.naver.com/atree12fly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