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최씨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메일로 정부 문서를 받아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 최근 미국에서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이메일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여기서 '스캔들'이란 그가 국무장관으로 업무를 보면서 가끔 개인 이메일 계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개인 이메일은 정부 이메일 계정에 비해 보안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힐러리가 백악관 내부 자료를 민간인에게 전달한 것도 아니고, 정부 기밀문서가 해킹으로 유출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적 메일 계정을 공무에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청문회에 불려 다니고 연방수사국의 수사를 받아야 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메일 문제로 힐러리에게 맹공을 퍼부어 왔고, 자신이 당선되면 힐러리를 감옥에 보내겠다며 벼르고 있다. 이메일로 힐러리를 들들 볶는 것은 의회, 공권력, 정적만이 아니다. 이메일 사건으로 인해 적잖은 국민들이 클린턴에게 등을 돌렸다.
불안한 사적 계정을 업무에 쓴 부주의함과,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전문가 정신(professionalism) 부족만으로도 심각한 결격 사유라고 보는 것이다. 지난 9월에 공개된 여론조사 결과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에이비시(ABC) 뉴스와 <워싱턴포스트>가 공동으로 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의 62%가 '힐러리가 이메일 의혹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고 답했고, 긍정적으로 답한 유권자는 고작 32%였다.
이 결과는 트럼프에 대한 유권자들의 태도와 흥미롭게 비교된다. 같은 조사에서 유권자의 65%가 트럼프의 이민정책에 반감을 표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슬림을 입국 금지하겠다'라거나, '멕시코 국경에 만리장성을 쌓겠다'는 비상식적 발언을 계속해 온 데 따른 것이지만, '힐러리 이메일'이 트럼프의 외국인 혐오만큼 반감을 사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메일 게이트'는 힐러리가 트럼프의 계속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지지 격차를 크게 벌리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설명해 준다. 10월 26일 발표된 <폭스뉴스> 여론조사를 보면, 두 후보의 지지율이 44% : 41%로, 3% 포인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만일 힐러리가 백악관의 민감한 문건을 '친구'에게 보내 '의견'을 물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대선 후보는 고사하고 (트럼프 아니더라도)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최순실의 '해명'이 드러낸 더 큰 심각성
최순실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제의 태블릿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청와대 보고서를 "이메일로 받아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공직자가 아니니 정부의 공식 이메일 계정을 가지고 있을 리 없고, 당연히 개인 이메일을 통해 첨부파일을 받아 보았을 것이다.
수신자가 개인 이메일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박근혜 대통령은 '힐러리 이메일 스캔들'의 과오를 범한 것이고, 이렇게 발송된 문서가 정부 기밀에 해당하기에 '국가 기밀문서 유출'이라는 또 하나의 중대범죄가 추가된다. 태블릿이 누구 것이든, 박 대통령은 국가 통수권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기 충분하다.
최순실은 태블릿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태블릿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쓸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계일보>는 후속 기사에서 최순실이 인터뷰 도중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고 썼다. 설마, 천하의 최씨가 피처폰을 쓰고 있을 리 없고, 스마트 폰으로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듯, 태블릿 사용법은 스마트폰과 동일하다.
<TV 조선>의 27일 보도에 따르면, 최씨는 대포폰만 4개를 쓰고 있고, 그중 하나는 박대통령과의 '핫라인'이다. 설마 4개 모두가 피처폰일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 공신이었던 <조선>이 답을 준다.
"신사동 사무실 영상에 찍힌 최순실씨는 스마트폰을 자주 만집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통화도 합니다. 자세히 보면 각각 붉은 색 케이스와 검은 색 케이스를 씌운 다른 스마트폰입니다." 최순실은 "남의 PC를 보고 보도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취득 경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검찰에서 확인해봐야 한다"며 검찰의 수사를 촉구했다. 혐의를 부인하면서 검찰에게 수사 방향을 지시하는 행태,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자기 것이 아닌 태블릿에 커다란 '셀카' 사진이 들어있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박 대통령과 사적 친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연결돼 있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신령한 힘을 빌려 사진을 남의 컴퓨터 속으로 '순간이동' 시켰을 리는 없을 터이다.
게다가 최순실씨 얼굴이 찍힌 사진은 '태블릿을 쓸 줄도 모르는' 사람 치고는 '노련한' 솜씨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듯 자연스러운 시선과 은은한 미소, 낮은 조명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구도… 필경 한두 번 찍어본 솜씨가 아니다.
사진에 대한 후속 보도가 궁금해진다. 사진 정보를 확인하면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찍었는지 알아낼 수 있고, 해상도와 초점 거리로 스스로 찍었는지, 남이 찍어 준 사진인지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한심한 공조최순실이 대통령 연설문을 수정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나도 연설문 쓸 때 친구 얘기 듣는다"며, 그게 무슨 문제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그가 무슨 연설을 했던가? 세월호 보도에 항의하며 외친 "하필 대통령이 KBS를 봤네"? 아니면 최순실과의 연결 고리가 드러나자 식음을 전폐하며 몸으로 행한 '묵언의 연설'?
그 친구에게 한 번 물어보라. 자신의 이런 행동에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말이다. 연설문이 외부로 유출될 당시 이정현은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다. 당연히 그도 수사 대상이고, 이 기막힌 사태에 책임을져야 한다.
이정현의 '나도 친구' 반론도, 대통령의 1분 30초 짜리 녹화 사과도 먹혀들지 않자, 청와대는 '대통령 피해자론'을 꺼내 들었다. 새누리당에서는 '태블릿은 남의 것'과 (당연히) '종북론'이 등장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태블릿 PC는 다른 사람의 명의"라며, 문제의 태블릿이 최순실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공안 검사출신이라는 분이 왜 이리 순진할까? 김진태 의원은 '대포폰'이라고 들어봤는가? <조선>이 보도했듯, 최씨는 대포폰을 여러 개 가지고 있고, 불법으로 축적한 막대한 차명 재산 의혹도 받고 있다. '대포폰'과 '차명 재산'의 공통점은 본인의 명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 얼굴이 박힌 태블릿이 타인 명의의 '대포 PC'라면, 오히려 더 엄밀한 수사가 필요하다. 애초부터 불법적 용도로 쓰기 위해 구입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더 나아가, 특검을 요구하는 야당을 향해 '문재인도 같이 특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승-전-종북'이 그의 주특기라 치더라도, 최씨에게 넘어간 자료 가운데는 이명박 정부가 북한과 세 차례나 비밀 접촉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살벌한 대결구도가 형성된 가운데 북한측과 비밀리에 만난 것이고, 이 사실을 박근혜 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도 '내통'이며, 특검 감인가?
청와대와 여당의 대응 방식을 보면, 왜 이런 일이 터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대통령 스스로 상식적이지 못한 터에, 자신 주위까지 모두 몰상식한 이들로 채웠기 때문이다. 개인과 시스템 모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속 보이는 청와대와 여당의 꼼수
해 아래 새것이 어디 있겠는가?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뻔한 것들의 조합일 것이다. 우선 청와대 비서관이나 최씨 측근 한 명을 희생양으로 만들려 들 것이다. 대통령 스스로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한 상황에서도, 그 대리인은 '시키는대로 일 잘 한 죄'로 국정 자료 유출의 책임을 떠안게 될 터이다.
더불어 이번 사건의 최대 고발자였던 JTBC의 <뉴스룸>이 태블릿을 입수한 경위를 문제 삼을 가능성이 크다. 법적 문제로 시비를 걸며 추가 보도를 차단하려 들 것이다. <뉴스룸>의 최순실 보도는 한국 언론사상유례 없는 쾌거였고, <한겨레> 또한 언론이 무너진 시대에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소수의 언론이 암울한 시대에 희망의 빛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들을 지켜낼 책임이 국민들에게 있다.
청와대는 야당과 여당 일각에서 제안한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거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줄곧 '식물 대통령'이었다. 대선 후보가 되기 전부터 당선 이후까지 가방 하나, 옷 한 벌, 연설문 한 장까지 무자격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지도자가 아니다. 설사 그가 독기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얼어붙게 만든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국가를 경영할 능력과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직책을 수행할 권위가 남아 있는지 숙고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번 만큼은 대통령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