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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할아버지의 예언

내 어린 시절은 6.25 한국전쟁 전후로 고향 마을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입대했다. 그럴 때마다 마을사람들은 입대하는 장정들에게 무운장구를 빌었다.

그 얼마 후 그들 가운데는 일부는 전사해 하얀 광목천에 싸인 유골상자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한 장병의 유해가 돌아올 때는 역전 광장에 마련된 제단 앞에 모여 엄숙히 고인에 대한 묵념을 드리며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육군소위 임관 직후의 기자
육군소위 임관 직후의 기자 ⓒ 박도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어린 손자의 앞날을 염려했다.

"네가 군에 갈 나이가 될 때는 아마 남북통일이 될 거다. 그러면 너는 군에 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 입대할 때도 남북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손자의 손자뻘이 군에 입대하는 이즈음에도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휴전선은 그제나 이제나 요지부동이다. 분단 70년이 넘었는데도 남북통일의 기미는 여태 안개 속이다.

지금도 선거 때나 고위 공직자 청문회 때면 후보자 및 그 직계가족들의 병역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 아들의 병역문제가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젊은이 가운데 군대에 가고 싶어 입대하는 이보다,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꼭 가야만 하는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병역을 기피하고자 하거나 꺼려하는 데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규명과 함께, 국군이 '국민의 군대'를 만드는 여섯 가지 방안을 내 나름대로 제시해 본다.

그 첫째가 우리의 주적이 동족이라는 점 때문으로 여겨진다. 사실 남과 북은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장차 분단은 상상할 수 없었던, 한 겨레 한 핏줄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백성들은 몽매에도 그리던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되었다. 해방의 기쁨에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짖던 그날, 우리나라는 이미 38선을 경계로 분단이 된 상태였다. 미소 두 강대국들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곧 북녘은 소련군이, 남녘은 미군이 진주했다. 그들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칼로 시루떡 자르듯이 한반도를 싹둑 두 조각으로 잘라 분단시켜 놓았다.  

 1945년 9월 9일, 미군 주둔 후 조선총독부(후 중앙청) 광장의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사진 왼쪽). 일장기가 내려진 다음 그 자리에 미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사진 오른쪽)
1945년 9월 9일, 미군 주둔 후 조선총독부(후 중앙청) 광장의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사진 왼쪽). 일장기가 내려진 다음 그 자리에 미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사진 오른쪽) ⓒ NARA

남북 정치지도자의 최우선 과제

해방 3년이 지나자 북위 38도선 이남에서는 대한민국이,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는 우리 백성들이 원했던 해방 후의 나라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는, 그 무엇보다도 통일된 조국을 세우는 게 최우선 과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통일된 조국 건설보다 서로간 적대적 감정을 부추기는 데 앞장섰다. 그뿐 아니라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통일을 이루려는 데 혈안이 됐던 것이다. 그 결과의 하나로 북한은 1950년 한국전쟁을 도발했다. 그러자 미국이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참전하고, 이에 중국이 참전했다.

이 전쟁으로 수백만 명 백성들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을 낳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력통일이 어려웠던 것은 남과 북에는 각기 다른 강대국들이 뒤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진정한 정치지도자였다면 어떻게 하든 강대국들을 설득시켜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했어야 함이 올바른 자세였을 것이다. 사실 나도 보병학교 수료 후 실무부대에 배치돼 분단의 현장을 처음 보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느낀 점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동족이 서로 상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병역을 기피하거나 거부하는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나보다 그런 점을 더욱 심각하게 여겨 차마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어 병역을 기피한 이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정상의 나라에는 국가를 보위하는 국군이 있어야 함은 마땅하다. 하지만 분단된 나라, 그것도 우리 겨레의 내부적 문제가 아닌, 강대국의 세력 판도에 따른 분단국가에서 젊은이들에게 동족끼리 총을 겨누게 하는 것은 냉정히 생각할 때 이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남북 지도자에게 간절히 호소를 드린다.

정녕 겨레의 안위를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라면 남북분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진지한 자세뿐 아니라, 이를 최우선 통치 철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철학을 가지지 않는 호전적인 이는 결코 남북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

 전역 직전 비암리 부대 연병장에서
전역 직전 비암리 부대 연병장에서 ⓒ 박도

남북 평화회담 체결

그 두 번째는 남북 평화회담 체결이다. 남북 통일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면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은 현재의 휴전상태를 평화상태로 바꾸는 데 온갖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현재의 남북 군사대결은 유치한 어린이들 싸움과 비슷하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책상을 배정받았다. 그러자 우리 코흘리개들은 책상 가운데에 줄을 긋고 홈을 팠다. 그런 뒤 옆의 짝과 서로 학용품이나 손과 팔이 그 가운데 선을 넘으면 서로 때리거나 물건을 빼앗는 유치한 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분단 이후 남북의 현실이 이와 같이 치졸했다. 그 결과 애꿎은 백성들만 숱하게 죽었다.

뭍에서는 150여 마일에 철조망을 이중삼중으로 친 뒤 초소를 짓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면서 총질을 하거나 대남·대북방송으로 상호 비난을 퍼부었다. 바다에도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는 서로 함포를 쏜 뒤 수장시키고는  서로 자기네가 이겼다고 뽐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피땀 어린 돈으로 국제 무기업자들의 봉 노릇을 하고는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단군 할아버지가 볼 때는 동족상잔으로 이 얼마나 유치한 장난이요, 바보짓인가.

이제라도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은 남북 평화협정 체결에 전력을 다하라. 그리하여 남과 북의 군사력을 서로 협의하여 과감히 축소하라. 그리하여 군사 대결을 지양한다면 남북 모두 의무병역 기간도 대폭 줄어들 것이며, 입대 병력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세 번째는 국민개병제도에 대한 철저한 법 집행이다. 그 법의 취지에 맞도록 모든 대한민국 남성은 신체에 이상이 없는 한, 군 입대를 원칙으로 하되 예외 규정을 남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고위공직자의 자식은 특별 관리한다든지, 또 고위공직자는 임명에는 원천적으로 병역미필자를 제한하는 등의 규정을 강화한다면, 현역 장병이 군 미필자 무등병에게 '받들어 총'을 하는 모멸감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후방교차 근무

넷째는 전후방교차 근무의 과감한 도입이다. 특수병과가 아닌 일반 보병, 포병, 기갑, 공병, 헌병, 의무 등의 병과는 복무기간의 1/2은 전방에서, 나머지 1/2은 후방에서, 또는 그 반대로 교차 근무를 시키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병사들이 군 복무 중에 백(배경)이 없어, 학벌이 낮아 전방근무를 한다는 불만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다섯 번째는 앞에서 제시한 방안, 곧 남북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국민 개병제도에서 모병제도로 과감히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병역으로 인한 그동안의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모두 해소할 수 있다.

 마지막 근무부대인 비암리 Cap 소대 위병초소 앞에서(1971. 3.)
마지막 근무부대인 비암리 Cap 소대 위병초소 앞에서(1971. 3.) ⓒ 박도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

그 여섯 번째로 대한민국 국군은 '국민의 군대'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가졌던 상하관계, 군 인권문제, 내무생활 등 제반문제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의 예를 들면 신병이 전입해 오면 상관이나 선임들이 그들의 발을 닦아주는 그런 자세로 변해야 할 것이다. 군에 입대한 신병들은 귀한 자제들이다. 이들은 나라의 방위를 위해 입대한 거룩한 인재들이다.

정말로 민주적인 인사들이 모인 정책담당자들이 선진국의 군대생활을 연구한 다음, 그들보다 더 앞선 대한민국 국군의 병영문화를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국군은 그야말로 국민의 사랑받는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게 될 테고, 우리의 국방은 더욱 튼튼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병영문화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내가 군에 있을 당시 만일 전쟁이 일어났다면 총알이 어디로 날아갔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화력만 우세하다고, 숫자만 많다고 전쟁에서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치지 않은 병사들의 전투력은 글쎄다. 한 예를 들자면 장제스 국부군이 대만으로 쫓겨간 교훈을 들 수 있겠다.

비록 현역에서 떠난 지 45년이 된 한 예비역 육군 중위의 제안을 정치권과 군 고위당국자는 귀담아 듣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대한민국 국군'을 만들어 주기를 당부하며 22회에 걸친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1부 초록색 견장' 연재를 모두 마친다.

그동안 열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 곧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로 이어집니다. 계속 많은 성원과 질책을 부탁 드립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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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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