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는 우리나라 임금으로 세우고 최씨는 중국 황제로 세울 것이다."비기(秘記)나 도참(圖讖) 같은 예언서에나 나올 법한 문구. 최씨·정씨 커플의 등장을 예고한 이 문구는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사 문제의 지문이다. 2009학년도 국사의 마지막 문제는 위와 같은 예고가 나온 시기의 사상적 동향을 묻는 것이었다.
"미륵의 시대가 온다!"는 예언이 퍼졌던 시대였다고 했다. 미륵의 시대! 발음이 급한 사람들은 '미르의 시대'라고 읽을 수도 있는 그 미륵의 시대가 오면, 속세에서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니 그에 대비해 군사적 준비를 갖추라. 그런 예언이 퍼졌던 시대였다고 했다.
또 다른 한 켠에서는 "정씨와 최씨 성을 가진 두 진인(眞人)을 내세워 우리나라를 평정한 뒤 정씨를 임금으로 세우고, 그런 다음에 중국을 정복하여 최씨를 황제로 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온 시대였다고 했다. 眞人은 요즘 말로 하면 메시아다. 이처럼 미륵이나 진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 시대의 사상적 특징이 어떠했는지를 맞추라는 문제다.
어느 시대든지 간에, 말기가 되면 메시아 사상이 힘을 얻는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미륵·정씨·최씨가 동시에 부각된 시기는 조선 후기 혹은 말기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인 유교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문제의 정답은 "유교적 명분론이 민중에게 설득력을 잃어가면서 비기·도참 등이 유행했다"는 4번 문항이다.
이 시기에 하필이면 정씨와 최씨가 동시에 부각된 이유는 뒷부분에서 설명된다. 또 정씨와 최씨 중 누가 더 높았는지도 뒤에서 함께 설명될 것이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 백성보다도 조선 왕조에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 정부는 독자적으로 일본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이순신 같은 정부군 장교의 공로도 물론 컸지만 '내 집, 내 땅, 내 고장은 내가 지킬 수밖에 없다'며 총궐기한 민중의 의병투쟁이 없었다면,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때 간판을 내렸을 것이다.
백성들이 정부를 따르는 가운데서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면 모르겠지만, 그들이 선조 임금을 무능하고 무책임하다 질타하는 가운데 의병 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일본군이 물러갔기 때문에, 전쟁 후에도 조선 정부는 백성들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외국 군대인 명나라군의 도움까지 빌렸으니 조선 왕실은 이래저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회 도처에서 서민대중의 도전이 활발해졌다. 고용주를 상대로 한 노비들의 투쟁이 활발해진 것이나 서민 예술가 혹은 지식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서민들의 입김이 세지고 양반 지배층이 위축되는 그런 속에서, 眞人 사상을 앞세워 혁명의 필요성을 설파하거나 직접 혁명을 시도하는 일들도 많아졌다. 예언서의 결집체라 할 수 있는 <정감록>이 특히 유행한 것도 반체제 지식인들이 그런 활동을 하면서 이 책을 집중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터져 나온 중대 사건이 있었다. 위의 수능 20번 문제가 나오도록 만든 사건이다. 이른바 이영창 역모사건이다. 숙종 때인 1697년에 발생한 이 사건은, 서얼 출신인 한양 주민 이영창이 반체제 세력을 형성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예비·음모 단계에서 적발돼 의금부에 끌려간 사건이다.
배후에 대단한 군사력 있는 것처럼 과장한 이영창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영창은 자기 배후에 대단한 군사력이 있는 것처럼 과장했다. 장길산 세력과 금강산 승려 세력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말이 수능 20번 지문이다.
<추안급국안>이란 기록물이 있다. '추안(推案) 및(及) 국안(鞠案)'이란 뜻이다. 왕명을 받고 수사를 개시하는 특별 사법기관, 의금부에서 생산된 사건 기록이다. 추안은 일반적인 심문인 추문(推問)의 결과를 담은 문서이고, 국안은 고문이 수반된 심문인 국문(鞠問)의 결과를 담은 문서다.
바로 이 <추안급국안>에 수능 20번 지문 즉 이영창의 발언이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이영창은 "금강산 승려 분들과 장길산 무리를 모은 연후에, 진인(眞人) 정씨와 최씨를 앞세워 우리나라를 평정한 뒤 정씨를 임금으로 세우고 그런 다음에 중국을 공격해서 최씨를 황제로 세울 것이니, 함께 참여하시지요"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이영창은 은밀하고도 열심히 사람들을 모았지만, 결국 자기가 포섭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의 고발에 의해서 의금부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의 제안을 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이영창을 추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래의 이익'과 '저 자를 고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이익'을 저울질했다. 그러고는 112를 눌렀다. 그렇게 해서 사건이 예비·음모 단계에서 발각되었다.
의금부가 조사해 보니, 금강산 승려 세력은 실체가 분명치 않았다. 장길산 세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신빙성이 낮아 보였다. 이영창이 모은 사람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지만, 거사의 성공에 필요한 결정적 군사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의지와 계획이 어떠했든 간에, 결과적으로 이영창은 어느 정도는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조사를 받다가 고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성계·정도전의 라이벌로 활약한 정몽주와 최영
세력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이영창이 정씨와 최씨를 거론한 것은, 당시 대중 사이에서 정씨·최씨 진인에 대한 기대심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씨나 최씨 진인이 출현해 조선왕조를 갈아엎고 신천지를 열 것'이라는 희망의 심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정씨와 최씨에 대해 기대감을 건 것은, 조선왕조 건국과정에서 이성계·정도전의 라이벌로 활약한 대표적 인물이 정몽주와 최영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은 쿠데타(위화도 회군)를 단행한 이성계에 맞섰다가 참수형을 당했고,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에는 찬동했지만 정도전이 추진한 토지개혁 때문에 심기가 뒤틀려 조선 건국을 반대했다가 이방원한테 테러를 당했다.
이런 역사적 사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정씨와 최씨가 왕조에 대해 품은 한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성씨를 앞세우면 국가를 전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임진왜란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는 백성을 지켜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그런 기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신천지를 열려다가 실패한 인물이 바로 이영창이다.
이영창은 '정씨는 한국 왕으로, 최씨는 중국 황제로' 세우는 방안을 구상했다. 한국인에게는 한국 왕이 최고이겠지만, 스케일 측면에서는 중국 황제가 더 낫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영창은 최씨 진인이 정씨 진인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정서는 일부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조선왕조 건국 이후로 최영 장군을 숭배하는 무속인이 많았던 데서도 그런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그런 분위기를 활용해, 최씨 진인을 최상위에 내세워 신천지 즉 새누리를 만들겠다는 게 이영창의 구상이었다.
최순실·정윤회가 일으킨 혼란은 1697년 이영창이 일으킨 것보다 훨씬 더 심대하다. 이영창은 예비·음모 단계에서 발각되었지만, 최·정은 막후에서 권력까지 장악한 뒤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기 때문에 먼 훗날의 수능시험 출제자들 중에는 이영창 사건보다는 최순실 사건을 출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영창 사건에서는 최씨·정씨 두 진인이 이영창의 입에서만 거론됐지만, 최순실 사건에서는 실제로 최씨가 진인처럼 직접 등장해 국정농단을 일삼았으니. 수능 출제자의 입장에서는 최순실 사건이 훨씬 더 매력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