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8월 1일자에 실려 있는 영천성 수복 전투 기사를 읽어본다. 기사는 전투의 경과, 승전의 의의, 승전 이후 포상 관계 등을 말해준다.
'권응수가 영천의 적을 격파하고 성을 회복하였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의 적과 서로 응하여 한 길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선비와 백성들은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정세아·조성·신해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용약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대부에 가자(加資, 품계를 올려줌)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군수가 되었다.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으나 군사들을 권응수에게 붙이고 행진(行陣, 진지)에 있지 않았으므로 상을 받지 못하였다.'
정세아가 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우선 최현(1563~1640)은 <인재집>에서 "영천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군위와 의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들이 바람처럼 도망쳤다. (경상좌도 가운데를 잇는 길이 끊어지자) 안동과 경주의 일본군은 서로 호응하기 어려워졌고, 마침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천, 군위, 의성, 안동, 경주) 5읍이 회복되자 경상도의 백성들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우리 군대의 사기도 점차 회복되었다"라고,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의 의의에 대해 언급했다.
영천성 수복, 임진왜란 전체에서 가지는 의의그러나 그는 "이제 매복했다가 일본군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 중단되지 않았다. 이는 모두 영천이 먼저 창의했기 때문이다. (중략) 영천의 500 의사들 중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포상은 2∼3명에게만 주어졌다"라고 비판했다. 임진왜란 극복이든 영천성 수복전 승리든 결코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공로가 아닌데도 수많은 의사들의 죽음과 피와 노력을 과소평가하고 묵살하고 있다는 신랄한 질타이다.
게다가 이욱은 논문 <임란 초기 영천 지역 의병 항쟁과 영천성 복성>에서 '영천성 복성 보고자였던 경상좌병사 박진은 마치 자신의 지휘 하에 전투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고하였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 결과 '의병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권응수와 정대임만 상을 받게 되고 정세아 등 다른 의병장들은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선조실록> 1592년 9월 2일자 기사 중에도 그런 의심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가 '박진에게 양피옷을 하사했다'는 대목이다. 9월 2일이면 박진이 지휘하여 경주성을 되찾게 되는 9월 8일보다 전이고, 처음 경주성을 공격했다가 대패하는 8월 21일보다 뒤이다. 즉, 박진은 영천성을 수복한 데 포상으로 임금에게서 양피옷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7월 27일 영천성 수복에 자신이 결정적 기여를 한 양 보고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만하다.
특히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영천성 수복 직후가 아니라) 난리가 평정된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에도 정세아는 "신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른 것이지 공훈과 명예는 뜻함이 아닙니다" 하며 '모든 공을 제장(諸將, 여러 장수)들에게 미루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가장 많은 병력 거느렸던 정세아 의병장종합하면,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지만' 초유사 김성일이 영천 지역 의병대장으로 임명한 권응수에게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싸우게 양보하고 작전참모로 전투에 참가한 까닭에 성을 되찾은 후 '상을 못 받은(<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세아는 그냥 선비답게 고향에서 제자들을 기르고 학문을 연구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정세아의 예는, 1604년 6월 24일 공신 104명을 책봉할 때 곽재우, 조헌, 고경명, 김천일 등 의병장들은 한 명도 넣지 않고 그 대신 압록강까지 선조를 따라다녔던 내시 24명, 왕이 타는 말을 끄는 이마(理馬) 6명 등은 당당히 1등공신에 올린 사례에서도 확인되듯이, 조선 조정의 불합리한 논공행상이 상식을 벗어나는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의 현장을 둘러보니영천성은 다 허물어지고 없다. (영천성 수복 기사는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 교과서에 수록되어야"> 참조) 그러나 당시 남문 일원에 있었던 조양각의 위용은 오늘도 당당하고, 그 아래를 흐르는 남천 또한 세월의 무게를 잊었는지 오로지 평화롭기만 하다.
물론 우리가 지금 보는 조양각도 1368년(고려 공민왕 17) 정몽주가 당시 영천부사 이용 및 지역 선비들과 힘을 합쳐 건설했던 바로 그 정자는 아니다.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단도 거느렸고, 때로는 명원루 또는 서세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던 고려 말기 건물 조양각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수복 전투 당시 불에 타서 사라졌다. 현재 건물은 인조 때(1623~1649) 다시 지어진 것이다.
조양각은 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쉬었다가 가는 중요 지점 중 한 곳이었다. 통신사는 일본으로 갈 때 한양을 떠난 이후 경안, 이천, 음죽, 숭선, 충주, 안보, 문경, 유곡, 용궁, 예천, 풍산, 안동, 일직, 의성, 의흥, 신녕, 영천, 모량, 경주, 구어, 울산, 용당, 동래를 거쳐 부산 앞바다로 닿았다. 그래서 조양각이 있는 영천시 문화원길 6의 조양공원에는 통신사를 상징하는 여러 게시물과 조형물이 흔히 게시되어 있다. (조선통신사에 대해서는
<'일본 침략' 정반대 대답한 조선통신사 두 사람> 참조)
조양각에서 200m 가량 서쪽의 강변 절벽 위에는 또 하나의 임진왜란 유적이 있다. 이곳 일대는 남천을 천혜의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자연스레 막아주는 강이나 호수의 물길)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조양각 인근과 지형이 대략 비슷하다. 유적의 이름은 창대서원.
영천시 창대서원1길 9-18에 있는 창대서원은 임진왜란 의병장 창대(昌臺) 정대임을 모시기 위해 1697년 처음 지어졌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당해 훼철되었고, 1955년 녹전동 창대마을에서 지금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 뒤 20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차 복원하였다. 창대서원에는 현재 강당, 사당 충현사, 재실 유의재, '의병대장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창대 선생 신도비'가 남아 있다. 당연히, 창대서원은 고색창연한 문화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라. 아니, 정성을 가지고, 우리 역사와 정신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보라.
이곳 창대서원 일대는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수복 전투 당시 정대임 의병장이 적장 법화의 목을 벤 곳이다. 수십 명만 간신히 경주 쪽으로 달아나고 나머지 적병들은 그날 이곳에서 모두 죽었다. 싸움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법화는 어쩔 수 없이 절벽을 뛰어내려 목을 의병장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광경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영천성을 되찾은 뒤 경상도 일원 백성들의 얼굴에 활짝 피어난 웃음꽃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지금도 조양각 일대와 남천이 어우러진 풍경은 오로지 아름답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