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국민 앞에 잘 나서지 않던 박근혜 대통령이 열흘 새 두 번이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단군 이래 유래를 찾기 힘든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상서롭지 못한 일로 대통령의 사과를 열흘 동안 두 번이나 받아야 하는 국민의 마음은 침통하고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 10월 25일, 박 대통령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인정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됐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선 실세의 정체가 드러난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후 속속 드러난 최순실 일파의 헌정 유린 전모는 전 국민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국민들이 경악한 것은 단지 최순실 일파가 헌법기관들을 무력화시키고 국정을 농락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모든 일이 박 대통령의 묵인과 비호 아래 외교와 국방까지 포함해 전방위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최순실 일파가 박 대통령을 감쪽같이 속이고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면 국민들은 박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동정심과 이해심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야박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미르와 K-스포츠재단에 돈을 출연하도록 박 대통령이 직접 재벌 기업들에게 요구했다는 증언과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동계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는 최순실 일파의 이권사업으로 전락했고, 그 뒤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있었다. 박 대통령의 비호나 최소한의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이트'의 본질... 대통령이 개인에게 국가를 갖다 바친 사건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일파라는 사설집단에 국가를 통째로 갖다 바친 사건이다. 이 둘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길래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검찰이든 특검이든 나중에라도 이 점은 꼭 밝혀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언니-동생이었든, 교주-신도의 관계였든 또는 서로가 파멸적인 비밀을 공유한 사이였든, 박 대통령이 최씨 일파를 위해 헌법기관을 무력화시키고 헌정을 유린했다는 사건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이번 사건은 '최순실 게이트'라기보다 '박-최 게이트'라 부르는 게 합당하다.
불행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11월 4일 2차 사과문 발표에서 박 대통령은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라며 이번 사건을 최순실 개인비리로 몰아갔다. 본인의 잘못이라면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뿐이다.
그래서인지 국민들이 가장 궁금했던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정치 2선으로 물러날 의향이 있는지, 정말로 책임총리제를 중심으로 한 거국내각을 구성할 것인지의 문제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대신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는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박 대통령은 권력의 일선에서 한 발짝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금 우리 안보의 가장 큰 리스크가 바로 '대통령 리스크'임을 본인은 알고 있을까?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도 재벌에게 돈을 걷고, 한진해운 사태를 어설프게 처리해서 물류대란을 초래(이 과정에서도 최순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이번 사태로 대외신인도가 추락하고 국가 이미지가 손상을 입고 외교적으로도 망신을 당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식물 대통령'에게 외치를? '이중권력'에 내치를? 답 안나온다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이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아마 박 대통령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자신이 국가와 결혼했다는 박 대통령의 독특한 인식과 관계가 있다. 국가와 자신이 일심동체라면, 그리고 자기만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선의대로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아버지의 나라였고, 지금 자신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박 대통령의 2차 사과문은 1차 사과문이 나온 뒤 <조선일보>가 '부끄럽다'는 사설을 통해 제시한 수습책조차도 거부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는 박 대통령이 1차 사과문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사설을 통해 '박 대통령은 내치에서 물러나 북핵 위기만 관리하고 경제와 내정은 여야가 모두 지지할 수 있는 거국총리에게 맡기라'고 주문했다. 자사 종편인 TV조선이 "형광등 100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라"를 읇조리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들 뿐이지만, 박 대통령은 2차 사과문을 통해 자신이 임명한 김병준 총리체제를 유지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솔루션은 박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유지한 채 2선으로 후퇴한다는 면에서 야당의 요구사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야를 막론하고 내치는 책임총리와 거국내각에 맡기고 대통령은 외교와 안보만 챙기라는 해결책이 시중에 많이 나돈다. 이 방안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헌정을 유린한 박 대통령에게 정말 외교와 안보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을까?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로서 유사시 우리의 장병들에게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다. 헌법기관을 따르지 않거나, 즉흥적인 판단에 의한 군사 캠페인이 일어나는 경우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또한 대통령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외교가 어린애 장난인가? 북핵문제, 한일관계, 한중관계, 한미관계,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등 어느 하나 쉽지 않은 고난도 외교문제가 산적한 이 시점에 사실상 '식물 대통령'에게 외교를 맡겨도 되는 건가?
내치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을 통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거국총리에게 전권을 부여했다가 박 대통령이 중간에 조금이라도 변심한다면, '이중권력'의 혼란상은 또 누가 감당할 것인가? 그 모든 것을 다시 박 대통령의 '선의'에 맡기자는 건가? 잠시 잊었나본데, 지금 나라가 이 난리인 이유는 바로 박 대통령의 최순실을 향한 '선의' 때문이었다.
우리가 법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견제장치를 만들어서 국가를 운영하는 이유는 지도자나 대표자에 대한 선의나 인간적인 신뢰만으로 국가가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조차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다. 여기에는 과연 대통령이 지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라는 대중적인 의구심까지 포함돼 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대통령 직무 정지'
이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지금 이 순간 가장 긴급하게 취해야 할 조치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 직무수행을 즉각적으로 정지시키는 일이다. 대통령이 여론과 정치권의 요구에 못 이겨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하야가 되는 것이고, 국회에서 강제로 직무를 정지시키는 절차를 밟으면 탄핵이 된다.
지금 국민들은 모두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사실은 아마 <조선일보>도 그리고 집권당인 새누리당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25일 1차 사과문 발표 이후 각종 검색 순위에서 탄핵과 하야가 1, 2위를 휩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탄핵이나 하야는 청와대와 새누리당, <조선일보>는 물론 야권에서도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각자의 셈법은 다르겠으나, 사회혼란이 커진다는 게 공통적인 이유이다. 탄핵이나 하야를 주장했을 때의 역풍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한 혼란이 대체 어디 있는가? 탄핵과 하야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우리 국민이 그 정도의 혼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야당에서 사회혼란을 이유로 대통령의 직무정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가 그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며 국민의 성숙한 역량을 믿지 못하는 처사다.
이럴 때일수록 수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정권을 접수할 준비가 돼 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결정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야당의 모습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의 뒷덜미를 잡는 모습에 가깝다. 무슨 정치적 계산을 그리 오래하는지(계산능력이나 있는지도 의문이다), 무슨 역풍을 그리 걱정하는지 모르겠으나, 계산만 하고 역풍만 걱정하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음을 잊지 말라. 노무현 탄핵 때 역풍이 불었다고 걱정하는 것은 세차할 때마다 비가 왔다고 세차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역풍 걱정하는 야당? 대체 무슨 소리냐
옳은 길을 갈 때의 역풍은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모든 걸 그렇게 계산했다면 항일독립투쟁도, 광주시민군의 저항도 없었을 것이다. 독립군이 대한독립의 가능성을 높게 계산해서 총을 들었을까? 광주시민이 계엄군 탱크를 물리칠 계산서가 나와서 도청을 지켰을까? 그 모든 선조들의 위대한 투쟁의 역사가, 향후의 혼란이나 역풍을 고려하지 못한 철부지 행동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에 총을 들었다. 그것이 역사의 정의였기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2016년의 정의는 부덕한 대통령을 몰아내는 것이다.
사상 전무후무한 '박-최 게이트'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으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켜야 이번 사태의 진상조사도 보다 철저하게 진행할 수 있다. 대통령의 자리는 한시도 비울 수가 없으니 곧바로 차기 대통령 선거 준비에 들어가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사태의 근본원인 중 하나인 새누리당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새누리당이 국가를 망쳐 온 역사는 군사 쿠데타에서부터 IMF 환란에 이어 이번 '박-최 게이트'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버라이어티한 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진 적이 없다.
새누리당은 전신 한나라당일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으로 그리고 대선후보로 여러 차례 나섰기 때문에, 당 차원의 검증기회가 많았음에도 박근혜라는 정치인을 걸러내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 최순실과의 관계를 알고서도 부귀영화와 권력을 위해 눈감고 지나간 결과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지금은 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이런 대통령을 배출한 새누리당에 대한 신뢰도 박살난 상황이다. 박 대통령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다시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새누리에도 요구한다, 정권을 넘기라고
그래서 나는 요구한다. 대통령 보궐선거가 치러지더라도 새누리당은 이번만큼은 대통령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 새누리당이 지난 10년간 집권하는 동안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망쳐 온 죄과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너무나 너그러운 처사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새누리당이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과 역사에 용서를 구한다면, 그 진심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 행동이란, 자신들이 누려왔던 권력을 다시 국민과 역사에 반납하는 것이다. 먼저 박 대통령의 직무부터 정지시켜라. 그리고 보궐선거를 포기하고 야당에게 정권을 넘겨라.
물론 새누리당은 쉽게 권력을 반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권력은 원래 국민의 것이다. 우리의 권력을 위임하는 데에는 투표일 하루 잠시의 수고로움이면 족했지만, 그걸 다시 찾아오는 데에는 적지 않은 노력과 고통이 뒤따른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은 그래서 쉽지가 않다. 지금은 민주공화국의 위기다. 말 그대로 비상시국이다.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새누리당의 권력을 즉시 해체하고 회수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우리도 모르는 새 '순실 신국(神國)'이 도래할지 모른다. 이 나라의 진짜 주인, 주권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우리의 결집된 힘이 필요하다.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은 헌법전문에도 기록된 우리의 헌법정신이다. 지금부터 몇 주 동안의 시간이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것이다. 적어도 그 동안만큼은 우리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자. 마음의 소리를 가로막는 어둠을 걷어내자. 우리의 심장이, 우리의 가슴이 울리는 역사의 목소리를, 선조들의 뜨거운 피와 눈물을, 그리고 그렇게 되찾은 조국의 푸른 하늘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