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이 4일 발표한 대국민 담화 시간은 총 9분 20초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첫번째 담화문 보다 6배 가량이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대통령이 담화문을 통해 밝혀야 할 것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대통령의 담화문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감성적 수사로 가득 차 있었을 뿐 정작 국민이 기대했던 내용은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이날 대통령은 9분 20초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만 늘어놓은 채 무대 뒤로 홀연히 사라졌다.
대국민 담화에서 국민들은 ▲ 대통령의 진정성있는 대국민 사과 ▲ '박근혜 게이트'의 실체적 진실 ▲ 대통령의 2선 후퇴를 전제로 하는 정국 수습책 등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담화문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알맹이가 빠져있는 맹탕 담화문에 국민들이 허탈해 하는 것은 당연지사. 야권과 시민사회는 대통령의 안일한 상황인식에 다시 한번 장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날 담화문의 내용은 '대통령의, 대통령을 위한, 대통령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은 담화문 내내 국민의 동정심 유발, 책임전가와 변명, 권력 유지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본심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필요하다면 검찰 수사와 특검 수사까지 받을 수도 있다고 밝히면서도 검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치밀함까지 선보이기도 했다. 또 다시 국민을 실망시킨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다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이번 사건은 '박근혜 게이트'가 아니다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이번 사건을 '최순실씨 관련 사건'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미르·K스포츠재단의 기금 모금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고, 자신 역시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추진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이 과정에서 최순실씨가 이권을 챙기고 위법행위를 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의 몸통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선의를 악용한 최순실씨 개인의 일탈로 규정했다. 사상 초유의 국정문란 사태를 자신의 불찰이자 측근비리로 한정짓는 동시에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 증거들은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한 몸이라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이미 드러난 사실 이외에 추가적인 증거들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는 한 언론을 통해 '최순실씨의 조카 장시호씨가 자신 회사 직원들 명의로 5~6개의 대포폰을 만들어 사용했고 이를 대통령과 최순실씨도 사용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관련 의혹이 사실이라면 불법으로 개통된 대포폰을 사용한 대통령은 전기통신사업법 32조 4항 '다른 사람 명의의 이동통신단말장치를 개통해 이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을 어긴 셈이 된다. 법원은 이미 다른 사람 명의의 대포폰을 사용하기만 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번 사건은 대통령의 선의(?)를 악용시킨 측근 비리가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개입되어 있는 국가문란 사건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사실을 부정하며 측근의 개인적 일탈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한통속이라는 증거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는 후안무치한 처사다.
둘째, 검찰 수사와 특검 수사도 받아들이겠다. 단, 필요하다면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지시했다며 자신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히 임할 각오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특검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주목할 것은 대통령이 '필요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대통령은 국기문란의 중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수사 대상자다. 그 때문에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제기되고 하야가 공공연하게 거론되는 것이다. 검찰 조사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다. 그런데 대통령은 '필요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수사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대통령은 중대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수사 대상자다. 검찰 수사를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대통령이 검찰 수사와 특검 수용 의사를 밝힌 실질적인 속내도 들여다 봐야 한다. 먼저 대통령이 조건부 검찰 수사를 천명한 것은 검찰 조직을 장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정기관을 총괄하는 민정수석에 정치검사 출신 최재경 전 인천지검장을 임명한 것에서 드러나듯 대통령은 여전히 검찰권을 쥐고 흔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미 대통령의 담화문에 수사 가이드라인이 나와 있고 정치권력에 한없이 관대했던 전례로 미루어 본다면 검찰이 이번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특검으로 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수용의사를 밝힌 특검은 어디까지나 상설특검법에 의한 특검을 의미한다. 이는 특검에 합의한 새누리당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행 상설특검법은 특검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한 특검 후보 2명 중 1명을 대통령이 뽑도록 명시돼 있다. 이렇게 되면 수사 대상자인 대통령이 자신을 수사할 특검을 뽑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다.
더욱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특검추천위원회의 면면이다. 특검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차관, 법원행정처 차장, 대한변호사협회장, 여당 추천인사 2명, 야당 추천 인사 2명으로 구성된다. 정부여당 쪽 인사가 최소 4명이라는 소리다. 이들이 특검 후보 2명을 대통령에게 추천하고 대통령이 이 중 1명을 임명한다. 특검추천위원회에서 누구를 추천하고 대통령이 누구를 선택할 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현행 상설특검법은 특검의 수사범위도 특별위원회가 정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에 특검보 2명 역시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 있다.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추천한 특검보 후보 4명 중 2명을 다시 대통령이 '콕' 찝어 임명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특검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다. 상설특검은 말이 좋아 특검이지 대통령의 방패막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응하고 특검 수용 의사를 밝힌 것은 어디까지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셋째, 국정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
대통령의 이날 담화에서는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었다. 애초 김 후보자를 지명할 때만 하더라도 청와대는 대통령이 국정 2선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책임총리를 통해 내치는 총리가 맡고 외치는 대통령이 전담하는 시스템으로 가게 될 것이란 의미였다. 김 후보자 역시 3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100% 행사할 것이라 말해 '책임총리제' 구현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날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없이 "지금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경제도 어렵다. 국내외 여러현안이 산적한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돼선 안 된다"며 "국민들께서 맡겨주신 책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각계의 원로들과 종교지도자들, 여야 대표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국민 여러분과 국회의 요구를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대통령의 담화 내용은 결국 국정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비춰진다.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국민들의 탄핵과 하야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여전히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번 대국민 담화는 책임회피와 변명, 검찰 수사를 빙자한 꼬리 짜르기, 권력에 대한 의지를 내보인 한 편의 기만극에 지나지 않는다.
4일 발표된 갤럽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역대 최저치인 5%를 기록했다. 대통령이 하야해야 한다는 여론도 갈수록 비등해지고 있다. 이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국정수행을 위한 최소한의 동력까지 완전히 상실했다는 의미다. 대통령으로서의 정당성과 권위는 물론 도덕성까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을 뽑아준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결단해야 한다. 버티면 버틸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뿐이며 결국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대통령이야말로 민심을 거역하는 권력자의 최후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산증인이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국민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