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그리고 그의 딸 최순실과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이른바 요승으로 불리는 역사 속 인물들이 덩달아 관심을 받고 있다.
최태민을 신돈이나 보우에 비유하는 이도 있고, 2007년 주한미국대사관의 기밀문서에 나타난 것처럼 러시아제국 말기의 라스푸틴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라스푸틴은 몰라도, 신돈이나 보우는 자신들이 최태민에 비유되는 게 상당히 불쾌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최태민과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신돈과 보우, '요승' 취급하면 불쾌할 이유고려 말의 신돈은 공민왕으로부터 국정 전반에 관해 공식적이고 포괄적인 위임을 받았다. 조선 중기의 보우는 명종시대의 실권자인 문정왕후(당시엔 대비)로부터 국정 전반은 아니지만 불교 행정에 관해 공식적인 권한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최태민처럼 막후에서 대통령의 딸을 움직이거나 최순실처럼 뒤에 숨어 대통령을 움직인 경우와는 달랐다. 신돈과 보우는 비선 실세가 아니었다. 그냥 실세였다.
신돈·보우는 주어진 권력을 사용해 자기 시대의 진보적 이념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최태민·최순실과는 달랐다. 물론 신돈·보우도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자 권력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권력 사용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시대적 이해관계까지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신돈은 불교 승려이지만, 권력을 이용해 불교 교세의 확장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수행한 정치적 역할은 공민왕의 위임을 받아 신진 유림세력(신진사대부)을 정계에 포진시키는 일이었다. 공민왕은 몽골과 연계된 특권층인 권문세족을 몰아낼 목적으로 신돈을 앞세워 숙청 작업을 전개한 뒤, 그로 인해 발생한 빈 자리에 신진 유림세력을 배치했다.
공민왕이 유림세력을 위한 일을 불교 승려에게 맡긴 것은 유림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유림세력의 정치적 성장을 위한 일을 유교 선비에게 맡기기보다는 불교 승려에게 맡겨야만, 유교와 불교를 상호 견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권세 있는 가문이자 세력 있는 족속이란 의미의 권문세족(權門勢族)이란 불린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듯, 당시의 특권층은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한 자기 가문의 힘을 빌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에 비해, 신진 유림세력은 중소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자신의 학문적 실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신진 유림세력이 권문세족보다 훨씬 더 건강한 세력이었다.
바로 이 신진 유림세력이 신돈 덕분에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 나중에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공민왕은 고려를 튼튼하게 할 목적으로 신돈을 앞세워 이들을 후원했지만, 공민왕 피살 뒤에 이들은 신왕조를 창업하고 새 시대를 건설하는 주역으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신돈은 개혁세력을 중앙 정계에 심는 업적을 세웠다. 그것도, 불교가 아닌 유교 내의 개혁세력을 정계에 심는 역할을 했다. 나중에 신돈의 힘이 커지자 공민왕이 그를 역모죄로 몰아 죽인 것을 계기로 후세 사람들이 신돈을 요승이라며 손가락질하게 됐지만, 그가 한 일은 개혁과 혁명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요승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조선 중기 문정왕후의 종교정책 파트너인 보우(普雨)는 고려 말의 보우(普愚)와는 다르다. 조선 중기의 보우는 신돈처럼 신구 지배층의 교체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문정왕후는 16세기 중반의 관점에서 볼 때 구시대 보수파 정치인이었으므로, 그런 문정왕후의 파트너가 된 보우 역시 정치적으로는 보수파로 분류될 만했다.
하지만, 보우의 역할은 그런 잣대로만 평가될 수 없었다. 그는 교종과 더불어 불교의 양대 교파를 이룬 선종의 책임자인 선종판사였다. 그는 선종판사가 되어 불교와 유교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조선이 유교 일변도의 국가가 아니라 종교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국가가 되도록 만들고자 했다.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수포로 결국 돌아가기는 했지만, 보우는 정치적으로는 보수파로 분류될 수 있어도 사상적으로는 진보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문정왕후 사후에 16세기판 신진사대부인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보우가 신돈과 더불어 요승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일도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교과서를 억지로 추진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상적 다양성과는 거리가 먼 정권이다. 그러나 보우는 그들과 달리 사회의 사상적 진보를 추구했다. 그러므로 보우 입장에선 최순실 부류와 한 데 엮이는 게 꽤 불쾌한 일일 것이다.
러시아 황제 부부 고립시킨 라스푸틴, 최태민.최순실과 '동족'
요승 라스푸틴(1872~1916년)은 사정이 다르다. 그는 신돈이나 보우처럼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한 게 아니라 자기 나라인 러시아 제국의 멸망을 재촉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자신이 요승이라 불린다 해도 별다른 항변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스푸틴이 역사에 등장한 일의 기원은 러시아가 아니라 영국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이 영국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최강이 되도록 만든 주역,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년)의 건강 문제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빅토리아는 혈우병 보인자(保因者)였다. 혈우병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그것이 나타날 수 있는 유전적 요소를 몸 안에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조그만 상처에도 피가 잘 나고 한 번 피가 나면 잘 멎지 않는 그 병이 몸속에 잠재적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특성이 라스푸틴의 등장에 기여했다.
빅토리아의 유전적 특성은 외손녀 알렉산드라를 통해, 알렉산드라의 아들이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전해졌다. 알렉세이의 경우에는, 혈우병 보인자가 아니라 혈우병 환자였다.
모계 쪽 유전병인 혈우병이 황제가 될 자기 아들한테 나타났으니, 러시아 황후 알렉산드라는 미안하고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항상 떨칠 수 없었다. 당시 의학계는 이 병에 대해 뚜렷한 치료법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황후의 안타까움은 한층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1907년 알렉산드라 황후 앞에 등장한 인물이 라스푸틴이라는 신비주의 종교의 승려였다. 그는 황태자의 혈우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서 자신감을 표출했다. 신기하게도, 라스푸틴이 손만 대면 황태자의 혈우병 증상이 그때 당장에는 좋아지곤 했다.
그래서 황후 입장에서는, 아들의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라스푸틴을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이 2세 역시 황제이기에 앞서 아버지였으므로, 아들을 위해서라도 라스푸틴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황후와 황제 이전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으로 라스푸틴을 가까이하고 총애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비선실세로 떠오른 라스푸틴은 권력 사용을 절제하지 못하고 국정 농단의 원흉으로 부각되었다. 그가 일으킨 최대 문제점은, 인사문제에 개입하고 돈을 축적하고 세력을 형성하고 성적 문란을 일으킨다는 점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한 악행이었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라스푸틴으로 인해 황제가 백성 및 신하들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점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태민은 (대통령이 되기 전) 박근혜에게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기 말만 믿는 사람이 되도록 했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라스푸틴도 황제 부부를 자기 말만 듣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니콜라이 2세가 이른바 불통 정치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불통 정치의 폐해는 러시아가 참전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진가'를 발휘했다. 세계대전 급의 전쟁에 참전했으니 국민적 역량을 총동원해도 시원찮을 텐데, 니콜라이 2세는 국민적 단결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저해하는 일을 했다. 그 와중에도 소수민족과 소수 종파를 억압함으로써 국민적 단결을 스스로 저해했던 것이다.
이뿐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의 불통 정치는 정부나 정치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국회인 두마의 다수파를 끌어안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부 내의 다수파도 포용하지 못했다. 여기다가 라스푸틴이 보여주는 신의 은총만 확신한 나머지, 전쟁을 직접 이끌겠다며 지휘관들에게 간섭을 일삼다가 군부로부터도 반감을 사고 말았다.
황제가 이런 식이었으니,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은 물론이고 사회 기층부에서 밀고 올라오는 혁명의 열기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황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황제를 이렇게 만든 라스푸틴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었다.
라스푸틴을 놔두고는 러시아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일부 귀족들의 궐기에 의해 라스푸틴은 1916년에 암살을 당했다. 하지만, 라스푸틴의 수중에서 놀아난 러시아는 이미 침몰하는 배였다. 결국 1917년 러시아제국은 혁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렇게, 라스푸틴은 나라를 망가뜨린 '경국지승(僧)'이었다. 그래서 최태민 부류의 요승으로 불려도 결코 억울하지 않을 사람이다.
라스푸틴은 러시아 황실과 러시아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최태민과 최순실이 미칠 악영향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라스푸틴과 두 부녀가 '동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