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적힌 말로 오늘 할 말을 대신한다. 이상이다."이례적이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남긴 말의 전부다. 추 대표 뒤에 걸린 대형 걸개에는 "헌법 제1조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적혀 있었다.
곧이어 발언권을 넘겨받은 우상호 원내대표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몇 초간 침묵하다가 "갑자기 말씀을 안 하시니까..."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통상 최고위원회의가 열리면 당 대표는 가장 먼저 3,4분 분량의 메시지를 발표한다. 때문에 당 대표의 '한 줄 메시지'는 매우 특별한 경우로 기록됐다.
이례적인 일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당 대표·원내대표·일부 최고위원 발언이 이어진 뒤, 최고위원회의는 기자들을 내보낸 채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 자리에서 당 지도부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개적으로 할 수 없던 말을 주고받는다. 이를 통해 당론을 정하고, 당 전략을 세운다. 통상 비공개 회의는 30분 정도 진행한다.
그런데 이날 비공개회의는 10분 만에 마무리 됐다. 당 대표의 공개 발언도, 당 대표가 주재하는 비공개 회의도 속전속결로 마무리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별별 이야기가 나오니, 추미애가 헌법이라는 칼로 딱..."
회의에 참석한 복수의 당 관계자는 이날 추 대표가 심상치 않았다고 전했다. "크게 화를 냈다"는 얘기도 나왔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추 대표의 '버럭'은 두 곳을 향해 있었다.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 다른 하나는 당 내부다.
박 대통령은 전날 정세균 국회의장을 찾아와 국회에 국무총리 임명 권한을 넘기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서는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앞서 추 대표는 박 대통령을 상대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그것들이 지켜지지 않으면 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조건 중 하나가 "권력유지용 일방적 총리후보 지명을 철회하고, 대통령은 국정에서 손을 떼고, 국회가 추천하는 총리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국회가 총리를 추천하라'는 국회가 할 과제만 던진 채, '총리 지명 철회', '국정에서 손 뗄 것' 등의 자신의 과제는 어느 하나 풀지 않았다.
당장 야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시간끌기, 국면전환용 카드라는 비판이 나왔다. 총리 추천을 위한 국회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박 대통령이 자신에게 향해있던 시선과 국정 정상화 정체의 책임을 국회에 떠넘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박 대통령의 행태가, 전적으로 추 대표의 이례적 행동을 이끌었다고 볼 순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도, 박 대통령의 거짓 사과 논란이 일었을 때도, 박 대통령이 국회에 통보도 없이 총리를 지명했을 때도 추 대표는 정상적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복수의 관계자는 이날 회의 분위기가 무거워진 이유로 당내 기류를 꼽았다. 박 대통령이 국회를 향해 공을 넘겼고 일종의 함정을 판 건데, 그 프레임 안에 갇힌 주장들이 당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야권의 제안을 무시한 박 대통령의 역제안은 논의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는 게 추 대표의 생각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국회에 다녀간 뒤 총리 하마평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당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권한, 총리의 권한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됐다. 심지어 우상호 원내대표는 전날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외치는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윤관석 수석대변인은 이날 비공개회의 직후 추 대표의 '한 줄 메시지'와 관련해 "총리 권한이 어떻게 되니, 2선 후퇴 어디까지 하니 등을 이야기 하니까 헌법과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의미다"라며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니 헌법이라는 칼로 딱 (자르려는 것이다)"이라고 설명했다.
한 핵심 관계자는 "추 대표가 비공개회의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국민만 보고 간다. 내 말이 이제 당론이다'라고 말한 뒤 바로 회의를 끝냈다"라며 "그래서 비공개회의도 빨리 끝났고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다"라고 전했다.
박지원 "답답한 사람들이 총리 추천해달라고 문자나 보내고..."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야권을 향한 불만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 위원장의 전제도 "박 대통령의 덫"이 문제라는 것이지만, 야당의 안이한 생각은 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이날 오전 비대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 "국회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촛불은 계속 타오를 것"이라며 "우리가 국회에서 총리 임명과 관련해 계속 왈가왈부할 때 그 촛불은 국회를 향해서, 야당을 향해서 타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라고 강조했다.
총리 임명 등의 의제를 끌고 갈수록 박 대통령의 덫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은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도 "역시 대통령의 정치는 기가 막힌다"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며 "정신을 바짝 가다듬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박 위원장은 자신에게 총리 추천을 요청한다는 야권 인사들이 있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이날 박 위원장은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자천타천으로 총리 후보들이 10여 명, 그리고 뒤에서 거론되는 사람들까지 거의 20~30명이 거론되고 있다"라며 "이는 대단히 현실을 안이하게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아래는 전날 박 위원장이 박 대통령의 국회 방문 후 기자간담회를 열어 한 말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저와 가까운 인사에게 '박지원 대표가 추천하면 총리로 임명한다'라고 전화했대요. 이 대표가 그따위 전화를 한 걸,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은 흥분해가지고 나한테 추천해달라고 그런다고. 그게 말이 되요? 내가 추천하면 민주당에서 들어줘요? 새누리당에서 들어줘요? (그래서 박 대통령의 전략이) 시간 버는 거예요. '국회 너희들 (총리 추천)하라고 해도, 못하는 놈들'이라고 바가지 씌우는 거예요. 그런데 이 답답한 친구들은 문자로, 전화로 자기를 (총리로) 추천해달라고,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