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광복과 더불어 미군의 남한 점령으로 인하여 일제의 잔재들을 청산할 기회조차 박탈당했습니다. 70여 년 동안 분단과 전쟁, 군사독재와 반공 논리로 오히려 친일세력들이 득세하는 무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오욕의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반역의 시대로 역류하고 말았습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이미 국가 원수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8. 15 경축사에서 또다시 '건국절' 망언을 되풀이했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건국절 법제화를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까지 부정하는 이같은 행위는 보수정권의 기반이 오로지 친일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일본군 조선위안부 성노예 합의를 비롯해서 역사 왜곡에 광분하고 있는 수구세력들의 본질은 단순한 경거망동이 아닙니다. 여전히 친일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퇴행적인 우리 역사의 업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와 유럽은 나치 협력자 수천 명을 처형했고 중국과 대만만 해도 친일파를 사형대에 세웠습니다. 우리에겐 친일파 처단은 언감생심일지라도 친일파 청산은 고사하고 친일의 역사에 대한 단죄조차 쉽지 않은 일이 돼버렸습니다.
문학계에서 청산되지 않은 '친일'
지난 7월 26일,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육당문학상'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하기로 했다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위시한 역사·학술·진보·예술·노동·시민단체들의 항의로 친일문학상 제정을 철회했습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우리 문학계에서 친일 문학인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어찌 문학뿐만의 일이겠습니까마는 '친일역사 청산'이라는 구호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 실정에서 유독 친일문학인들에게 만큼은 작가들이 참으로 관대하고 유명작가들이 앞다퉈 '친일'문학상을 수상하는 현실이야말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깨우치고 우리 역사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과 후손들에게 친일작가를 기리는 '성대한 문학의 잔치'를 과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뼈아픈 반성이 없는 이들의 상찬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올바른 말과 글을 지켜내야 할 언어의 주관자인 작가들의 입이 가당치 않습니다. 올바른 생각과 뜻을 세워 글을 쓰는 작가라는 사람의 손이 무색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논란이 됐던 육당과 춘원문학상은 문인협회에서 추진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일각의 분별없는 사람들이 다시 제정했다고 합니다. '동서문화사'라는 출판사에서 '육당학술상'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해 오는 12월 1일, 시상식을 한다고 합니다. <중앙일보>에서 주관하는 제16회 미당문학상(수상자 김행숙 시인) 시상일은 12월 2일입니다.
누가 더 악질적이고 적극적이었느냐 하는 친일 행적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자의적 판단이며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친일인사들을 법정에 세워 민족사의 죄인으로 처벌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시 반민특위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거의 대다수의 친일 범죄자들이 죽고 없는 마당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에겐 친일역사 청산이라는 미해결 숙제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누가 봐도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부역행적이 뚜렷한 육당과 춘원, 미당과 동인문학상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친일'문학상이 바로 한국문단의 작가들에게 남겨진 역사적 과제이며 미해결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민족을 배반한 자를 두둔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작가들이 나서서 친일문인들을 어떻게 벌할 도리는 없지만, 최소한의 상식과 정의에 따른 작가정신을 바로 세워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친일문학과 친일문학상 문제는 우리에게 과거사가 아니고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논쟁거리가 될 수 없으며 친일의 역사를 마감하는 작가들의 응당한 책무이기도 합니다.
미당 서정주와 김동인은 대표적인 친일작가였습니다.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서정주와 김동인의 명단이 들어있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친일이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 하는 성격 규정을 두고 그들이 끼친 '문학의 업적'으로 사람과 문학에 대한 평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주장이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의 면죄부가 됐는데, 이것은 실로 문학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을 전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제 나라와 제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를 두둔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나라는 친일파와 그 잔존세력들이 반세기가 넘게 권력을 잡아온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에서도 올바른 역사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박근혜의 보수정권 집권 이후에는 역사의 시계를 노골적으로 거꾸로 되돌리는 본격적인 시도들이 재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왜곡 정권과 한통속인 보수 언론재벌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주고받는 우리나라의 문학계에서 작가들의 정의는 죽었습니다. 추악한 불의가 명예가 되고, 용서할 수 없는 부도덕이 권위가 되고, 긍정할 수 없는 가치가 권력이 되는 문학이 진정한 문학인 것인지요?
정말로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의분은 사라진 것일까요? 기회주의와 현실주의, 치욕을 모르는 반역의 무덤에서 작가들조차 덩달아 함께 짖어대는 요란한 승냥이떼들인가요? 시대의 가치와 살아있는 역사의 정신을 담보해야할 작가들이 가장 먼저 뜨거운 피를 잃었습니다. 뜨거운 피를 잃었다는 것은 분노하는 심장이 없다는 게 아니고 치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치욕을 모르는 작가는 작가들이 아니고 치욕을 모르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망치는 치명적인 해악입니다.
2001년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29개 단체들은 서정주 시인의 친일·친독재 행위를 강력히 비판하며 미당문학상 제정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아울러 민족운동단체와 진보예술단체들 역시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이들 단체들은 "시인들의 정부(政府)가 아닌 '반역'과 '독재'의 정부(情夫)였던 '미당문학상' 제정을 반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친일의 후예들이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이어 서정주를 통해 또 한 번 자신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위장하려 하고 있다"면서 서정주 시인의 생존 행적이 ▲ 조선인을 전쟁터에 내몬 '대동아성전'의 선전대원 ▲ 전두환 독재자의 생일에 축시를 바친 권력의 시녀였다고 규탄했습니다.
아울러 "거대언론이 친일을 합리화하는 문학상을 제정하려는 현실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중앙일보>에 항의했습니다. 특히 서정주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두둔하는 주장에 대해 "정의를 벗어난 펜은 총보다 무서운 흉기가 되어 민족과 이웃을 겨누게 된다"면서 "인간의 삶을 떠난 문학적 업적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문학만이 역사적 평가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문인들에게 요구한 바로는 '친일문학상이 될 미당문학상을 거부하는 시인이 나서길 간절히 기대한다' '문학상 심사와 수상거부는 물론 친일작가문학상 반대운동 동참을 촉구한다'고 했습니다.
찾아볼 수 없는 문학인들의 '각성'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각 지방의 지회, 지부에서 모두가 반대성명서를 내고 항의집회까지 벌였지만, 그 이후에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습니다. 반대운동은 눈 녹듯 사라지고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이 스스로 '친일'문학상이라고 규정한 미당문학상을 거의 독식했습니다. 한국 문단에서 영향력 있는 평론가와 원로 문인들, 명망있는 시인들이 가장 먼저 '친일'문학상을 심사하고 수천 만원의 상금과 상패를 받아 안았습니다.
한국작가회의 본회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어쩌면 대한민국 최고문학상의 명예를 일거에 움켜쥔 '친일'문학상 수상자들은 작가단체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친일'문학상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의 주체인 작가들의 무책임한 태도에서 비롯됐지만 이를 방조하고, 더 나아가 심사와 수상에 동조한 작가단체들의 책임이 더 큽니다.
미당문학상 같은 경우 진보문인단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작가회의' 에서만 단체의 정체성에 입각해 명확한 반대입장을 밝히고 거부선언을 한다면 하루 아침에 그 상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2016년 현재까지 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한 문학인들의 각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을 획책하는 보수언론에서 주는 '친일'문학상을 아무런 반성도 죄의식도 없이 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그 어떤 변명을 동원하고 문학이라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합리화를 하더라도 결국 작가로서의 영혼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이며 자발적인 친일부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바로세우지 않은 결과는 이토록 참담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역사를 양분으로 삼고 잘못되게 자라온 문학을 올바르게 세우지는 못할망정, 비뚤어진 망상의 바탕이 되는 '참으로 뜻 깊은' 친일문인들을 기리는 '친일'문학상이 인정받고 수상 작가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친일문학상 작품집은 단숨에 유명작가라는 상품으로 편승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문제가 한창 논란이 된 바 있었는데, 표절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 바로 친일문학 문제입니다. 표절은 반성과 양심의 문제지만 친일은 반역과 죄악의 문제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른바 수구세력들의 지킴이인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서 매년 거액의 상금을 들여 '친일'문학상을 시상하면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빛낸 사람들은 한국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이었습니다. 아무런 죄의식과 수치심도 없이 그 빛나는 상을 받드는 모습은 동료 작가들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연민과 비감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배반과 죄악을 덮어두고 동업자 정신으로 똘똘 뭉친 작가들이 '친일'문학상을 타는 동료들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내고, 그 상을 받으려고 강아지 오줌 마려운 듯 줄을 서는 비열함은 이제 문학의 개탄을 넘어서 '문학예술'에 대한 전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에 '친일'문학상을 반대하는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미당문학상 시상식을 앞두고 '친일'문학상 반대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친일문인들에 대한 문학적 옹호와 긍정론은 넘쳐나는데 반해 문학적 비판과 반대 담론이 부재한 실정에서, <'친일'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학술적·역사적·정신사적 이해와 분석, 토론을 통해 한국문단의 지배구조로 자리잡은 '친일문학'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고, '친일'문학상 반대운동을 쟁점화 시키는 공론화된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친일문학상 반대 토론회] '친일'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일시 : 2016년 11월 29일(화) 오후 2시 ~ 6시장소 : 대학로 함춘회관(서울대 총동창회관)주최 :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후원 : 역사정의실천연대[기조 발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주제 발표]사 회 : 김응교(시인, 숙명여대)발표 1 '친일'문인 기념사업의 현황과 문제인식 발제 :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토론 : 김점용(시인)발표 2 부끄럼의 부재와 세속주의-미당시의 훼절구조 발제 : 임동확(시인, 한신대) 토론 : 정세훈(시인, '리얼리스트100' 상임대표)발표 3 '친일'문인 문학상 정당화 논리, 절대주의 문학관의 문제들 발제 : 이규배(시인, 성균관대) 토론 : 안재성(소설가,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장)발표 4 디지털 시대에서 민족문학의 진로 발제 : 이도흠(문학평론가, 한양대) 토론 : 김란희(문락평론가, 고려대)[종합 토론] 사회 : 노혜경(시인)[총평]임헌영(문학평론가,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맹문재(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 안양대)*'친일'문학상 반대 온라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귀를 클릭하면 해당 서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친일'문학생 반대 온라인 서명운동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임성용님은 시인으로 친일문학상 반대 토론회 준비 실무담당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