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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더 많이 모이자"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닭 쫓던 개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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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전환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고 있다.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휩쓸려갈지 모르는 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조기 대선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백만이다. 2016년 11월 12일은 분명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는 러시아워 지하철처럼 변했다. 이렇게 거리에 사람들이 들어찬 것이 건국이래 처음인지, 6월항쟁 이후 처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각계각층, 남녀노소, 여야의 구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전국에서 단 하나의 목표, 대통령의 즉각 사퇴를 위해 모였다.
백만 명의 목소리는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여당 지지층에서도 슬금슬금 흘러나오던 탄핵의 목소리가 전직 여당 당대표자의 입에서까지 나오고 분당설도 터졌다. '수세에 몰릴 바에는 주도하자'는 의도가 읽힌다. 청와대도 움직이고 있다. '민심에 놀랐다'고 추임새를 넣고 있지만, 뻔히 예상된 결과에 놀랄 멘탈이 아닌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갑작스레 제안한 영수회담에서 사실상 2선 후퇴를 제안하려 한다는 소식도 나오고 있다. 의도는 뻔하다. 형사소추를 받지 않는 대통령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임기보장을 요구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사퇴 후 법적 처벌을 하지 않는 타협안을 말하기도 한다. 언감생심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껍데기만 남은 대통령일지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마지막 도리는 지켜야 한다. 그 누구라도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이의 마지막 책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수 없다. 조기대선은 불가피하다. 방법론만 남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많은 이들이 영수회담에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근거 없는 불안감은 아니다. 역사가 있다.
우리는 2008년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반성 없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지만,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복기가 필요하다. 지금의 촛불은 2008년의 연장선에 있다. 2008년의 촛불은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반감을 계기로 국민이 주권자로서 재인식하게 된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것만으로는 2008년 촛불항쟁의 성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2008년 촛불은 1987년 이후 진행된 민주화의 한계를 드러내고, 새로운 대안체제로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1987년의 항쟁은 군부독재세력에 의한 권력독점을 해체하고 자유주의적 대의질서를 기초로 한 정치적 민주화를 복원했다. 이 변화는 권력에 종속된 시장권력의 위상을 높였고, 견고한 독재체제와 결합되어 있던 분단체제 역시 해체의 가능성을 담지 했다. 87년의 민주화가 노동자들의 대투쟁, 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와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2008년 촛불항쟁은 이런 '87년체제'의 긍정성이 거의 소진되었으며, 이제 우리가 새로운 어떤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국민의 의사에 상관없이 벌어지는 국가결정, 시장권력을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체제의 파산, 6.15남북공동선언과 10.4선언으로 흔들린 분단체제.
떠올려보라. 시청광장에서 일어난 촛불이 어떤 대안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었는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재인식이 일어났고, 새로운 지향과 새로운 가치, 새로운 체제를 둘러싼 논쟁과 토론이 활발하게 불붙었다. 가히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후기87년체제'의 시발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2008년 촛불은 그 잠재력을 제대로 꽃 피우지 못했다. 6월 10일, 70만명이 참여해 절정에 올랐던 대규모 촛불시위는 우리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6월항쟁 이후 최대의 인원'이라는 찬사 속에서 광화문 광장을 막아선 컨테이너 박스(일명 '명박산성') 앞에서 벌어진 10시간의 토론. 경찰 저지선을 넘기 위해 컨테이너 박스 앞에 스티로폼 박스를 쌓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논쟁에만 1시간이 걸렸고, 스티로폼 박스를 넘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논쟁은 다음 날 오전 9시 30분,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후 촛불은 잦아들었고 모든 것은 정치권의 일정에 빨려 들어갔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한 촛불의 주도권은 기성 정치세력에 흡수됐다.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에 대한 열망은 야당의 '선거 승리'로 단순화됐다. 의혹 넘치는 천안함 사건에도 불구하고 야권의 승리를 가져온 2010년 지방선거,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2008년 총선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온 2012년 총선, 2012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의 득표율은 촛불의 힘을 흡수해서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곧이어 보수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국정원의 정치개입과 프락치 정치가 재현됐다. 최순실이 얼마나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질서를 문란하게 만들었는 지와 무관하게,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향한 열망이 여건 야건 낡은 시대를 움켜쥔 이들의 흡인력 속으로 빨려 들어간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결과다.
2016년의 백만 광장, 또 다시 직면한 2008년의 한계그래서 이번 촛불은 2008년 촛불의 연장선이다. 백만명이 모였다. 이런 대규모 국민이 결집된 것은 다시 우리가 2008년에 마주한 한계와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상황이 꼭 같지는 않다. 보수언론은 물론 여당까지 합세해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시 국민의 힘은 낡아 버린 체제의 틈바구니에 흡수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더 많이 모여야 한다'만 반복하고 있을 것인가?
물론 광장에 시민들이 모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알 수 없는 정치적 의도에 이리 저리 휩쓸리지 않으려면 백만이 모인 촛불은 2008년에 넘어서지 못한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인 가장 근본적인 이유, 즉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사퇴를 관철하는 것이다. 부당한 대통령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하는 방법은 하야, 사퇴, 퇴진, 탄핵, 타도다. 2선 후퇴 따위의 모호함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퇴와 하야, 퇴진이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탄핵과 타도는 강제적인 방법이다. 전자가 어렵다면 후자만 남는다.
많은 이들이 탄핵의 경우 정국의 주도권을 국민이 아니라 국회가 가져갈 수 있으며, 탄핵의 최종 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가 어떤 판결을 내릴지 신뢰할 수 없다고 반대하기도 한다. 또한 조기 대선에서 오는 혼란을 걱정하기도 한다. 타당한 분석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명백하게 헌법을 유린한 통치자라면, 그것이 대통령일지라도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역사적 경험을 남겨놓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보라. 해방 이후 권력자들에게는 '정의와 심판'이 통하지 않았다. 4.19혁명으로 대통령을 사퇴한 이승만에게도 그의 죗값을 묻지 못했다. 다양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기획자'의 꼼수가 걱정되더라도, 부당한 권력은 심판받는다는 전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의사회의 구현을 원하는 국민의 힘은 청와대만이 아니라 언제든 국회로도, 헌법재판소로도 향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하고 또 그래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더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백만명의 힘이 낡은 구시대의 권력에게 또 다시 흡수되지 않도록 만들 것이냐다. "더 많이 모이자"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닭 쫓던 개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가깝게는 '모여서,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멀게는 단지 '퇴진'을 넘어 '박근혜 이후의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를 우리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 국민이 함께 박근혜 이후의 대한민국을 그려봐야 한다.
'대안을 품은 저항'이 아니라면 또 다시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에 대한 열망은 낡은 세력에게 흡수될 뿐이다. 우리 역사가 그랬다. 2008년 촛불이 그랬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운동세력이 완전 배제된 채 여야 각 4인으로 구성된 일명 '8인 정치회담'이 그랬다. 6월항쟁을 일궈낸 수많은 국민들의 목소리는 물론 이후 노동자들의 대투쟁 역시 정치권과 철저히 괴리된 채 전두환 후계자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국민의 열망을 배반한 정치가 남긴 것은 절망의 정치, 낡은 시대의 수명연장뿐이었다.
14일 나온 박근혜 대통령과 추미애 더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에 대한 불안한 시선에는 이번에도 과거처럼 국민적 열망을 뒤로 한 채 낡은 시대의 산물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감이 베여 있다.
광장에서 공론장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논쟁하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단지 '박근혜 없는 세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이 불가피한 숙명적 결과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이 낡았다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광장은 공론장으로 진화해야 한다.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모이는 것'을 넘어, 우리가 생각하는 해법,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을 토론하고 논쟁해야 한다. 낡은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를 향해 가고 있는 세계 많은 나라들의 경험 역시 광장을 공론장으로 만들어 낸 결과로서 가능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박근혜 이후의 세상에 대한 대안이 있느냐고? 물론이다. 다만 그것은 아직 우리의 대안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사회 곳곳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이런 시도에 덧붙여 국민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 탄탄한 촛불로 진화되어야 한다. 청와대의 다음 프로세스가 무엇이건, 어떤 노림수가 있건, 영수회담에서 무엇이 제안되건, 국민이 주도해야 한다.
누군가의 의도처럼, 정국전환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고 있다.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휩쓸려갈지 모르는 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조기 대선은 불가피하다. 낡은 틀은 무너지고 있다. 이제, 국민이 직접 새판을 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