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외부 기관과 회의가 잡혀서 우연히 졸업한 대학교의 근처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30분쯤 시간이 남아 오랜만에 과 사무실과 컴퓨터실에 들러봤습니다. 풋풋한 후배들의 모습도 보고 추억에 잠겨있는데, 수업을 마친 교수님께서 저를 발견하고 갸우뚱하십니다.
졸업 후 너무 오랜만에 학교에 갔기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하셨던 거죠. 오래전의 그 졸업생이라는 걸 확인하고 반가워하십니다. 회사 일로 근처에 왔다고 하니 "그간 직장생활 하던 다른 애들은 애 키운다고 다 집에 갔다는데, 너는 '아직도' 현역이라니 참 애쓴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교수님은 왜 아이를 키우면 집으로 가야 한다고 인식하고 계셨을까요?
중요 보직은 남자에게 맡기려는 회사... 워킹맘은 여전히 힘들다그 옛날 저의 부모님 시절에는 결혼을 하면 혹은 임신을 하면 여성의 대부분은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저희 엄마 역시 다르지 않으셨죠. 그러나 언젠가부터 결혼을 한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은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최근 출산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하는 일은 당연시되었지만 아이를 돌볼 사람을 구하지 못했거나 아이를 돌보는 가족 혹은 고용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빈번해집니다.
아이가 기관에 입학하는 나이, 유치원에 들어가거나 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이의 적응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는 더욱 많습니다. 특히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은 여성 직장생활의 무덤이라고까지 불리는데요. 우리나라의 여성 고용구조는 M자형인데 자녀 출산에서 초등 입학에 걸친 30대에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이 직장을 그만둔다고 합니다. 출산 연령이 점점 늦어지면서 M자형의 골짜기가 30대 초반에서 후반으로 이동하는 것이 변화 정도랄까, 여전히 여성의 경력단절은 기정사실화된 얘기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인 결혼과 출산, 육아로 여성이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그리 오래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뿐만 아니라 저 역시 회사에서 결혼을 이유로 프로젝트의 중요 보직을 남자인 후임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봤으니까요(그때, 제가 맡은 일과 경력을 주장하며 후임에게 보직을 양보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경험한 것이 지금까지 제가 직장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30대 후반 육아의 길에서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의 경우 대개 아이가 아플 때, 혹은 초등학교의 입학 등을 이유로 꼽는데요. 그 시기가 가장 힘들기는 합니다만, 그때를 지나고 사춘기를 맞는 아이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자녀를 둔 워킹맘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수능을 치르는 아들을 둔 선배가 있습니다. 아이가 논술고사를 보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는 뒷모습에 눈물이 났다고 하시더군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수능을 보는 아이보다 더 떨려서 수능 당일에는 휴가를 내셨대요. 선배가 집에서 아이의 공부를 진작부터 챙겼더라면 아이의 어깨가 저렇게 무거워 보이지는 않을 텐데라는 자책감도 보입니다.
회사 일에 바쁘게 매진하다 보니 아이의 학습 습관을 잡아주는 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못했고, 입시정보를 얻는데도 무척 취약했다는 게 자책감의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는 회사 일에 조금 소홀하더라도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공부습관을 챙기라는 조언까지 해주십니다.
얼마 전 제가 친정어머니의 도움으로 쌍둥이 남매를 키우고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것을 보며 모 프로젝트 참여로 만난 S회사의 팀장님과 나눈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서 취업을 준비하는 딸을 두셨는데, 이 아이가 장차 워킹맘이 되면 아내가 손주를 돌봐줘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제 막 자녀를 품에서 내놓고 부부가 여행도 다니며 마음 편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후배를 보니 딸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신 거죠.
힘들게 초중고 12년과 대학 4년, 거기에 해외 유학 등으로 오랜 기간 보호와 투자를 해온 딸이 결혼이나 육아를 이유로 막 자리 잡은 직장을 그만둔다면 부모로서 너무 허무할 것 같다고, 아니 허무감을 넘어 화가 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십니다. 딸이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어쩔 수 없이 손주를 봐줘야 할 것 같다며 한숨을 쉬셨습니다.
공부뿐 아니라 취업, 자녀가 결혼하고 출산하면 손주까지 돌봐줘야 하는 시대인가 봅니다. 부모가 오랫동안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자녀의 커리어를 위해, 손주를 돌보기 위해서 언제든지 직장은 그만둘 수 있는 것이더군요. 마치 저의 친정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저와 같은 워킹맘들, 힘내세요!아이들뿐만 아니라 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사회가 정해놓은 막연한 타임테이블에 우리를 올려놓고 달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하나씩 정해진 숙제를 뛰어넘어도 인생은 결코 끝나지 않는 레이스라는걸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이 정해진 레이스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도 그다음에 더 어려운 숙제,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남편의 전폭적인 도움, 친정부모님까지 합세하여 아이들을 돌봐주셔서 저는 '아직도' 직장에서 현역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이들을 이유로 언제 회사를 그만둘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가끔 쌍둥이 남매가 엄마가 직장가는 것이 싫다고 직접 표현할 때, 아파서 제 한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볼 때 내가 왜 직장을 다니나 싶은 회의감이 커지죠.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직장다니는 엄마가 좋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빠른 경우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엄마는 왜 직장에 안 다녀?"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주변의 선후배들과 언제까지 직장을 다닐 것인지에 대해 얘기해보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각자가 처한 상황이 너무 달라 어느 한 방향이 옳다 그르다라고 말해줄 수가 없겠더군요.
그저 '아직도' 워킹맘인 당신께. 당신의 선택이 버티는 쪽이든 그만두는 쪽이든 지금까지 당신이 쏟아온 노력 덕분에 내 딸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워킹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수고했다고 힘내라고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습니다.
워킹맘의 선택을 응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개인블로그(http://blog.naver.com/nyyii)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