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서원은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447번지, 신주소로는 강변로 417에 있다. 예천군 지리에 익숙한 사람은 "황지리"라는 동명만 듣고도 도정서원이 어디쯤 있는지 대략 떠올릴 터이다. 그러나 타지 사람으로서는 그런 짐작이 가능하지 않다.
타지에서 온 답사자들은 오히려 '강변로'라는 신주소가 더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강변로는 도정서원이 강가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이름인 까닭이다. 하지만 서원이나 정자가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강변로라는 도로명만으로 도정서원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예천군을 관통하여 흐르는 강 이름이 내성천이라는 정도는 알아야 도정서원의 위치를 비슷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성천 아름다운 물길을 전망 삼아 서 있는 도정서원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도정서원이 뛰어난 자연 경관을 뽐내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뜻에서이다. 이는 조선 시대의 이름난 쉼터로 널리 알려진 삼강주막과 국가 명승 16호로 지정되어 있는 회룡포가 도정서원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다는 점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도정서원, 삼강주막, 회룡포, 이 세 곳 모두가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금모래 강 내성천을 끼고 있는 절경들인 것이다.
그런데 도정서원은 무심히 도로를 질주하는 사람의 눈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중앙고속도로 예천IC에서 불과 4km 거리에 있지만 서원 옆을 지나는 도로가 매우 한적한 길인 탓에, 우연히 마주친 문화유산 이정표를 보고도 즐겨 그곳을 찾아보는 이들마저 도정서원은 답사하게 되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다. 또, 도정서원이라는 이름도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도정서원(道正書院)은 선조 때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두 번, 대사헌(감사원장), 판서(장관) 다섯 번, 좌의정과 우의정(부총리)을 두루 역임한 정탁(鄭琢, 1526∼1605)을 모시는 서원이다. 정탁은 어떤 인물인가?
<선조실록> 1605년(선조 38) 10월 2일자는 정탁을 두고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이지만 과거 합격 후 (중략) 교서관에서 숙직을 하는 중에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려고 향을 가져 오라고 하자 (향은 나라의 제사에 쓰려고 준비해둔 물건이므로 개인이 불공을 드리는 데는 내줄 수 없다면서) 거절한 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벼슬길이 밝아졌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앞의 문단은 정탁이 높은 벼슬을 많이 역임했다는 것과 그가 부당한 명령에는 따르지 아니한 꼿꼿한 선비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도 여전히 정탁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태후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꼿꼿함
<선조수정실록> 1595년(선조 28) 3월 1일자는 황희 정승의 후손 황정욱(黃廷彧, 1532∼1607)과 그의 아들 황혁(黃赫)이 곤장 30대를 맞고 또 다시 7, 8대를 추가로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의정 정탁이 도와주어 목숨을 건진 사건을 전해준다.
황정욱은 서인이었지만 정탁은 그가 억울하게 죽음에 몰리고 있다고 판단하여 구출에 정성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결과 황정욱은 귀양을 가는 것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같은 동인의 공격을 받아 정탁은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황정욱 부자가 생명을 잃을 지경에 다다른 것은 임진왜란 중 왕자 임화군과 순화군이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포로가 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이었다. 함께 포로가 된 황정욱에게 가등은 선조에게 보낼 항복 권유문을 쓰라고 강요했다.
황정욱이 거부하자 가등은 왕자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어쩔 수 없이 아들 황혁이 글을 썼다. 황정욱은 이때 항복 권유문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힌 글도 써서 선조에게 부쳤다. 하지만 황정욱의 글은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 일로 황정욱 부자는 뒷날 죽음 직전까지 갔고, 정탁은 두 사람을 구원했다가 우의정에서 물러났다. 황정욱은 1597년 억울함이 밝혀져 귀양에서 풀려났다.
황정욱 사건의 전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탁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선조실록> 1596년(선조 29) 8월 8일자에는 선조가 최담령(崔聃齡)에 대한 고문을 직접 지휘하는 장면이 나온다. 충청도 지역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직후인데, 반군들은 세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반란 초기에 유명한 의병장 김덕령, 곽재우 등이 자신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을 했었다. 선조는 김덕령이 반란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의심한다.
김덕령을 죽이려는 선조에 반대하는 정탁정탁은 선조에게 "덕령은 의병으로 왜적 토벌에 스스로 앞장서 조정이 충용위(忠勇衛)라는 칭호까지 내려준 바 있습니다. (중략) 그를 죽인다면 흉적들은 소식을 듣고 사기가 충천할 것이며, 남쪽에 있는 우리 장졸들의 마음은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며 김덕령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선조는 결국 김덕령을 때려죽인다. 김덕령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부장 최담령은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김덕령의 부인은 남편이 죽은 후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김덕령을 살리기 위한 정탁의 노력은 대신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임무이다. 하지만 정탁과 같은 활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하는 일도 아니다. 정탁이 김덕령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때 (우리 국민 모두가 다 아는) 어떤 대신은 '김덕령은 송유진(宋儒眞)의 반란 때(1594년)에도 역적들이 배후 세력으로 자백했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현(韓絢, 이몽학의 동조자)이 또 그렇게 말했으니 이는 의심할 만합니다' 하고 선조에게 맞장구를 쳤다.
아직도 정탁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하더라도, 이순신을 살린 인물이라고 하면 모두들 "아! 그 사람!" 할 것이다. 김덕령을 죽인 선조는 이순신도 죽이려 했다. 선조는 1597년 2월 6일 이순신 체포령을 내렸고, 3월 4일 감옥에 가두었다.
이순신은 28일 동안 투옥되어 있었는데, 최소한 한 번의 고문도 당했다. 이순신이 고문을 당한 사실은 정탁이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선조에게 바친 <신구차(伸救箚)>의 '순신이 이미 한 번 형벌을 겪었는데 만일 또 다시 형벌을 가한다면 무서운 문초 아래 그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는 표현이 증언해준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갔지만 영의정 류성룡은 자기 위치가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충무공에 대한 선조대왕의 감정이 더 악화될 것을 염려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충무공의 목숨이 광풍 앞에 놓인 촛불 같은 그때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정탁이 감히 상소문을 올렸다. 그랬던 바, 그 상소문은 다행하게도 선조대왕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듦으로써 충무공을 죽음 속에서 구원해낼 수 있었다(이은상, '충무공을 구한 정탁의 신구차').
투옥되고 고문까지 당하는 이순신, 정탁이 구해냈다이에 대해 한명기는 임진란 시기 정탁이 보여주었던 구국 활동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순신을 신구한 일일 것이라 밝혔다. 그는 정탁이 이순신을 살려냄으로써 그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고,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궁극에는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여 나라를 다시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논문 <임진란기 약포 정탁의 구국 활동과 그 역사적 의미>).
한명기는 또 '선조는 (정탁의 <신구차>를 받고) 결국 이순신의 죽음을 면해주고 그를 감형시킨다. 그리고 이순신은 곧이어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여 누란(累卵, 계란을 쌓은 듯이 위험)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출해낸다. 요컨대 임진란 당시 조선을 구한 영웅 이순신의 활약 뒤에는 또 다른 영웅 정탁의 노심초사와 활약이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정해은도 '다행히 정탁의 변호로 이순신은 구명되어 백의종군하였다. 1597년(선조 30) 1월 일본군이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1만을 시작으로 2월 중순경에 조선에 상륙하면서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참패하고 원균마저 전사하자 7월 22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면서 '정탁의 용기와 신념이 낳은 결과'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논문 <임진왜란기 약포 정탁 선생의 활동>) .
이상호 또한 논문 <임란기 문경, 예천 지역의 유학과 학맥>에서 '정탁은 왕명으로 내려진 출정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한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왕명 거부에 대한 선조의 분노와,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룡을 몰아내기 위한 서인들의 속셈이 더해져, 이순신의 사형은 거의 확정정인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류성룡도 서인들의 공격으로 인해 이순신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의 사형을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을 했던 인물이 바로 정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이상호는 '72세의 노재상(정탁)이 올린 차자(箚子, 상소문으로 정탁의 <신구차>를 가리킴)가 없었다면, 명량해전과 같은 세계적으로도 위대한 해전은 일어날 수 없었으며, 이후 정유재란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략) 현실 앞에서 실천을 우선했던 정탁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늙어도 벼슬 욕심내는 게 보통인데 정탁은 달랐다<선조실록> 1605년(선조 38) 10월 2일자에는 정탁의 타계 소식이 실려 있다. 정탁은 1605년 9월 19일 고평리 집에서 80세로 별세했는데,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기사 속에 자신의 의견을 첨부했다. '호성공신(扈聖功臣) 정탁은 재상으로 발탁되었는데,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옛사람들의 치사(致仕, 벼슬을 사양)하던 기풍을 보여주었다'면서 '높은 벼슬을 욕심내어 늙어도 물러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라고 호평했다.
좌의정이던 75세(1600년)에 두 번에 걸쳐 사임을 요청하고, 이윽고 78세(1603년) 정1품 영중추부사로서 임금의 허락을 받아 벼슬을 완전히 그만두었던 정탁은 고향 고평리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요즘말로 하면 마을 자치 규약인 고평리 계약문(契約文)을 만들어 모두가 평화롭게, 서로 도와가며 사는 풍토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 한가할 때면 내성천에서 배를 저어 고기잡이로 소일했고, 강변 절벽 위에 지은 작은 정자 읍호정(挹湖亭)에서 그 동안 쓴 글을 정리하는 등 마지막 생애를 가다듬었다. 읍호정은 지금도 도정서원 앞에 호젓이 서 있다.
하루는 정탁이 내성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누렇고 가느다란 참골풀로 엮은 초립동 갓을 쓴 젊은 사내가 정탁에게 다가와 물었다.
"낚시하는 노옹(老翁, 늙은이), 약포(정탁)가 강 건너에 사시는가?"정탁이 대답했다.
"그렇소만…….""내가 볼일이 있어 약포 선생에게 가는 길인데, 나를 업어서 좀 건너 주시게."정탁은 태연히 그를 업고 내성천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물을 거의 다 건너왔을 때쯤 초립동이 다시 물었다.
"요즘 약포 선생께서는 무슨 일을 하며 어찌 소일하시는지 혹 아시는가?"정탁이 초립동을 물 건너 땅에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예. 약포 선생은 가끔 낚시도 하고, 때로는 초립동이를 업어서 물도 건너주며 지내고 있습니다."너무나 놀란 입을 딱 벌린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하던 초립동은 이윽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백배사죄하였다.
도정서원 현지 안내판의 안내문 |
도정서원(道正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447
이 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좌의정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40년(인조 18)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1697년(숙종 23) 사림(士林)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강당채를 세워 도정서원으로 승격되고, 약포의 셋째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 1571∼1629) 선생을 추향하고 있다. 1866년(고종 3) 서원철폐령으로 일부가 철폐되었다가 1997년 동재, 서재, 전사청, 누각 등을 복원하였다.
사당(문화재자료 142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강당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홀처마지붕으로 전면에 난간을 돌려 누각 형식을 취하였다. 서원 앞에 위치한 읍호정(挹湖亭)은 1601년(선조 34)에 가파른 경사면을 깎아 강물을 뜰 듯이 강 가까이 세웠다.
약포 선생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을 신원(伸寃)하여 특별 사면되게 하는 등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선생의 셋째아들 청풍자 선생은 당대의 이름난 성리학자요 초서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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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숭현사는 문화재자료 152호
도정서원 경내에는 읍호정 외에도 강당채, 사당, 동재와 서재, 누각 입덕루(入德樓), 관리동 등이 있다. 이 중 문화재자료 152호인 사당 상현사(尙賢祠)는 1640년(인조 18) 향현사로 처음 세워졌는데, 조용, 윤상, 권오복을 함께 배향했다.
강당은 1700년(숙종 26)에 사림에서 건립했다. 1723년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정탁의 위패를 옮겨서 봉안했다. 1786년부터는 선생의 삼남 정윤목도 종향하고 있다. 누각과 동재 및 서재는 1997년에 복원했다.
누각 2층, 강당채, 사당 뒤편 언덕, 읍호정 등 어디서 바라보아도 도정서원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내성천 전망을 바라보며 멋지게 서 있다. 그러나 도정서원은 뛰어난 경치만 뽐내는 곳이 아니다.
임금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담대하게 나서지 못할 때 이순신, 김덕령 등 출중한 장군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바른말을 했던 정탁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한민족 반만년 최대의 전쟁 비극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정탁의 실천정신이 깃들어 있는 역사유적이다.
정탁의 유물을 보관했던 정충사, 도정서원 가까이 있다도정서원 외에 정탁과 관련되는 대표적인 유적은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466번지에 있는 정충사(靖忠祠)이다. 정탁을 기리고, 그가 남긴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1980년에 세워진 정충사는 영정각과 유물관, 장판각, 관리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정충사로 간다. 정충사는 문집 등 정탁의 유물을 보관했던 곳이므로, 이순신을 살려낸 업적만이 아니라 재상으로서의 정치적 능력 발휘와 선비로서의 학문적 성취를 돌이켜 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일 것이다.
정충사는 도정서원에서 서쪽으로 내성천을 건너 직선 거리로 약 2km 정도 거리에 있다. 아주 가깝다. 그러나 서원이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고, 정충사는 뒤쪽 산 너머 강 건너에 있어서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 있지 않아 차를 몰고는 두르고 또 둘러서 5km가량 가야 한다.
서원을 등지고 선 채 문득, 초립동이를 업어서 건네준 내성천 금모래가 돈을 쫓는 강 개발 사업에 밀려 마구잡이로 파괴되고 있다는 슬픈 소식을 정탁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