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채용 전형시험그날 오산학교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교사 채용 전형필기시험을 보게 됐다. 다른 분들은 그런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던 듯, 가방에서 참고서를 꺼낸 뒤 시험장에서 열심히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왔기에 다소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딪쳐 보자는 그런 담담한 심경이었다.
곧 종이 울리고 감독관이 왔다. 그분은 말없이 한 사람 한 사람 시험지를 나눠주고 60분간의 고사시간을 줬다.
시험문제는 모두 전공으로 국어 일반에 관한 문제였다. 5문제 가운데 3개를 골라 답하는 문제였는데 나는 그 가운데 3개를 골라 답을 했는데도 시간이 남아 다른 한 문제도 답을 썼다.
시험관은 합격자에게는 학교에서 곧 통지가 갈 거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무렵 좀 건방진 탓인지 그 학교에 쉽게 채용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60여 명이 몰려온 것을 보고 좀 놀라고 당황했다. 마침 신문에 마포구에 있는 ㅎ여중고에서도 교사초빙 광고가 났다.
나는 오산학교에서 시험 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그 ㅎ여중고 교사초빙에도 응했다. 곧 1차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해 면접을 보러갔더니 그 학교에서도 전공교과에 대한 필기시험이 있었다. 1차 서류 전형에 통과한 응모자가 10여 명은 돼 보였다.
시험문제는 대입 본고사 수준으로,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문제는 두보의 시 '춘망(春望)' 편이 출제됐다. 그 시는 고교시절 고문을 가르쳐 주시던 김영배 선생님과 특강으로 두시(杜詩)의 대가 동국대 이병주 선생에게 들은 바 있었기에 자신 있게 답을 쓸 수 있었다.
시험 후 집에서 기다리니까 두 학교에서 모두 최종 면접을 보라고 속달 편지가 왔다. 날짜가 더 빠른 오산학교에 갔더니 필기시험 성적으로 두 명을 뽑은 뒤 면접으로 최종 한 명을 뽑는다고 했다. 그날 면접을 본 뒤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틀 후 최종 합격했다고 전보가 왔다.
그런데 ㅎ여중고 측에서도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니 최종 면접에 응하라고 연락이 왔다. 그 며칠 새 한 학교라도 합격하기를 기다리는 불안한 처지에서, '양손의 떡'처럼 두 학교 가운데 한 학교를 선택해야 할 행복한 처지에 놓였다.
오산학교 나동성 교장 선생님결국 시험을 칠 때 교실에서 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의 유훈 말씀, 그리고 중고교 시절 매료되었던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시인의 모교란 점, 그가 읊은 'JMS' 등의 시가 나의 발걸음을 오산학교 쪽으로 가게 했다.
더욱이 최종면접 때 만났던 당시 오산학교 나동성 교장의 인품과 말씀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분은 합격자 첫 소집에서 12 신임 예비교사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죽 부른 뒤 말씀했다.
"나는 관 두껑을 닫을 때까지 인사에 공정을 기하겠습니다.""나는 여러분에게 돌아갈 몫을 중간에서 가로채지 않겠습니다.""존경받는 스승 되고 사랑받는 제자 되게 정성 다합시다." 깡마른 체구에 카랑카랑한 그분의 목소리가 내 폐부를 찔렀다. 그 말씀들이 내게 복음처럼 들렸다.
그분은 마치 간디의 풍모였다. 나는 오산학교로 마음을 굳힌 뒤 구비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교사자격증 원본을 제출하면 대조한 다음 돌려준다고 돼 있었다. 그때까지 내 교사자격증은 신성학교 재단이사장실 금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교사자격증을 되찾다서류 준비 첫날,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소공동 김 재단이사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김 재단이사장은 나를 보자 대뜸 말했다.
"
아니, 학교에 근무치 않고 여긴 왜 왔소?""네에? 전 이미 지난 해 연말에 사의를 표했고, 벌써 교장 선생님에게 사표도 제출했습니다.""나는 아직 당신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습니다.""그때 교장 선생님이 분명히 신학기에 그만 둘 사람은 당신에게 미리 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그런데 당신 재임 중 문제가 많았다는데….""네에?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그분은 그 질문에는 대꾸를 하지 못한 채 일방으로 선언했다.
"아무튼 당신 교사자격증 줄 수가 없소.""네, 좋습니다. 그 교사자격증은 문교부에서 개인 박도에게 교사자격이 있다고 준 증표입니다. 그런데 그걸 볼모로 잡는 것은 인권침해입니다. 나는 이 길로 문교부와 검찰청으로 가서 김 이사장님을 고발할 겁니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김 이사장은 곧 말을 바꿨다.
"앉아요. 내가 당신을 놓치기 아까워서 그랬던 거요. 박 선생이 우리 학교로 간다면 주임 자리는 곧장 보장하겠소.""전 그런 자리 바라지도 않습니다."김 이사장은 여직원에게 금고에 든 내 교사자격증을 꺼내오게 한 다음 나에게 돌려줬다. 나는 그걸 서류봉투에 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왔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3월 1일은 삼일절로 공휴일인데 유독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는 개학식을 거행했다. 그 까닭은 오산학교를 세우신 교조(校祖) 남강 이승훈 선생의 3․1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후학들의 정성 때문이었다. 그분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당신의 육신마저 민족의 제단에 바치신 분이시다.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있는 오산중고등학교는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의 후신으로, 뜻있는 졸업생들이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재건한 학교인데, 수복 후 서울로 옮긴 학교다.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이 시대에 애국애족의 오산정신(五山精神), 남강정신(南岡精神)을 부르짖는 오산학교와 그 졸업생들의 독백이 시대착오적인 '소경의 잠꼬대'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영혼들에게 겨레 사랑, 나라사랑을 심어주는 교육은 민족혼이 메마른 이 땅의 교육 풍토에 눈물겹도록 갸륵하기만 하다.
학교의 사계(四季) 중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날은 입학식 날이다. 졸업생들이 떠난 어딘가 썰렁한 교정에 봄바람과 함께 풋풋하고 발랄한 신입생들이 밀려오면 학교는 새댁을 맞는 잔칫집 마냥 흥겹다.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이었던 날1972년 3월 1일, 나는 그날을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교단에 선 후 처음으로 담임을 맡아 그들과 첫 대면을 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듯한, 개구쟁이 티를 벗지 못한 중학교 신입생들. 새 교복, 새 모자, 새 운동화… 모두가 새것들이다. 갓 딴 풋과일처럼 신선하다.
어머니가 3년 동안 입으라고 마련해 준 교복은 상의는 반코트요, 하의는 핫바지다. 처음으로 쓴 중학생 모자가 헐렁해서 눈썹조차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처럼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다가 다시 모자를 얼른 쓰고 거수경례를 하고는 멋쩍은 듯 쏜살처럼 도망을 간다. 마치 고삐 풀린 송아지나 망아지처럼.
그날 나는 1-12반 팻말 앞으로 다가가자 70여 신입생들이 목을 뽑고 새 담임인 나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 녀석들이 귀여워 맨 앞 녀석부터 한 녀석씩 살펴가며 그들의 복장을 가다듬어 주거나 볼을 쓰다듬어 주며 맨 뒤 녀석까지 훑어갔다.
"야, 우리 담임 되게 젊다. 아주 싱싱하다.""굉장히 무섭겠다."내가 그들을 지나가면 저마다 나에 대한 촌평을 소곤거렸다. 그날 밤 나는 낮에 본 신입생 얼굴들이 아른거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