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하루아침에 청기와집 주인이 바뀌는 기적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들 은근한 기대를 가슴에 품은 채 민중총궐기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집을 나서며 설레었던 마음은 돌아올 때 절망이 되어 있었다. 그날은 멀리서 버스를 대절해 온 사람들의 숫자를 뺀 지하철 승객 통계만으로도 130만이 넘는 사람이 모인 큰 집회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언을 듣거나, 구호를 외치거나, 유명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런 이들에게 집회는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듣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 집회'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100만이 넘는 사람이 모인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했다'라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시위대의 청와대 행진을 허용하라는 법원의 결정을 무시한 채, 경찰은 경복궁 사거리부터 차벽을 촘촘히 세웠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는 듯 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모인 탓에 움직이기도 어렵고, 키 작은 사람들은 앞 사람의 뒷머리 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두 사람이 경찰버스 위로 뛰어올랐다. 그런다고 크게 달리질 리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저항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답답함이 그들을 행동하게 했을 것이다. 무기를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려와!", "비폭력!"을 목청껏 외쳐댔다. 꽹과리까지 쳐가며 말이다. 다수의 군중이 '경찰차에 오르는 불법(?)'을 저지른 약자에게 비폭력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다수와 다른 형태의 저항에 도전했던 이들은 이내 풀이 죽어 내려오고 말았다. 오히려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함께 버스에 오른 경찰에게 "폭력경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칠 수는 없었을까.
집회와 시위를 왜 하는가? 선거를 통해 우리가 뽑은 대표라 할지라도 감시와 견제는 지속되어야 한다. 집회와 시위는 약자가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것은 모든 국민이 갖는 권리임과 동시에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다. 그리고 집회 참가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다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경찰의 '임무'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찰은 집회 참가자의 보호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을 비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지난해 국가 폭력이 백남기 어르신을 어떻게 살해하는지, 그 영상을 생생히 지켜보지 않았던가. 끝내 경찰의 사과는 없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사실 백남기 어르신으로 하여금 경찰버스에 줄을 묶어 당기는 폭력(?)을 행사하게 만든 것은 경찰의 불법 차벽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면서, 수구언론이 만들어낸 '폭력시위'라는 정치적 덫에 갇히고 말았다.
유엔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 마이나 키아이의 말이다.
"한국에서 집회의 자유는 일종의 특권으로 전락했습니다."
유럽안보협력기구 민주제도 및 인권사무소 평화적 집회의 자유 가이드라인을 살펴보자. '원래 집회는 허가 대상이 아닌 권리다. 집회는 의도한 대상이 보이고 들리는 곳(우리의 경우는 청와대)에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또 평화적 집회는 사람을 성가시게 하거나, 화를 돋우는 행동, 심지어 제3자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저지, 훼방, 방해하는 행동까지 포함한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집회에 참가하면 된다. 다만, 자유의지와 판단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불법 차벽에 저항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오른 것이 어떻게 불법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하고 비폭력이라는 구호 때문에 무기력 해야져야 하는가. 그날의 행동은 폭력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폭력 저항에 대한 책임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면 된다.
잘못된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집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장애인 이동권을 주장하는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경장연)가 성남시청에 항의 방문 갔을 때, 이재명 시장과 그의 지지자들은 경장연 활동가를 두고 '평화를 깨는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시장인 자신에게 저항하는 이들을 무례하다 느꼈을까?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맞섰기 때문에 비난하고 싶었을까?
내가 속했던 협동조합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조합원 간의 갈등으로 힘겨워 하는 사람을 대변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비난이 쏟아졌다. 강자가 약자를 소외시키거나 비아냥거릴 때는 침묵하던 사람들이 반대로 약자가 목소리를 내자, 불편한 내색을 드러냈다. 어떤 행위가 비록 정의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려 불안을 초래하거나, 감정의 소모로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면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서글픈 모습이다.
다수의 중립적인 사람들은 침묵이 평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의에 외면하고 눈감는 것은 결코 평화일 수 없다. 차별이나 억압, 폭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 사람에게 평화라는 이름으로 질서를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폭력이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고,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외면하거나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 사회에 만연한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자는 자신이 공범이라는 것을 알아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