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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를 표지로 그려놓고 있다.
▲ 나태주 꽃시집, 별처럼 꽃처럼 능소화를 표지로 그려놓고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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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1, 2002)
나태주 시인은 '풀꽃'을 발표하고 10년 뒤인, 2012년에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에 '풀꽃'이 실리면서 이 시대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교보문고가 작년 글판 25주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판에 풀꽃이 선정된 것은 그 증거일 것이다. 짧지만 쉬운 시어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던 나태주 시인이 1970년부터 써 왔던 작품들을 모아 시집 '별처럼 꽃처럼'을 냈다. 특별히 시인이 좋아하고 평생을 두고 천착해 왔던 '꽃'을 노래한 작품들을 모아 꽃시집으로 엮었다.

어린 시절부터 꽃을 좋아했던 시인은 "날마다 만나는 꽃들은 천국 소식을 알려주는 메신저였다"고 고백한다. '사심 없이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상인 꽃을 보며 많은 양의 시를 창작'했다는 시인은 자칭 '철없는 인간'이다. 첫사랑이자, 고백의 대상인 꽃을 보며 철없는 인간은 시집 책머리에 '왜 꽃을 노래하는지'를 이렇게 밝혔다.
"꽃은 미학적 대상이면서 사실적 대상이다. 서양의 화가 르누아르 같은 이는 노년에 이르도록 장미꽃과 여자가 없었다면 자신은 화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꽃은 고혹의 대상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

'꽃과 여자' 때문에 화가가 되었다고 고백한 르누아르를 언급하며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밝힌 시인은 철없는 인간, 어린 아이처럼 솔직하다. 솔직함은 인생의 미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어른이자 시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대놓고 자신의 순정을 드러내 놓는 것은 진부한 느낌이 들게 할 수도 있고, 성희롱적인 언사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태주 시인의 어떤 시구는 너무 익숙해서 저잣거리에서 익숙하게 연애를 거는 남정네를 떠올리게도 한다.
너를 사랑하고 나서
누구를 다시 더 사랑한다
그러겠느냐

조금은 과하게 사랑함을
나무라지 말아라
피하지 말아다오

하나밖에 없는 것이
정말로 사랑이라
그러지 않았더냐 (겨울 장미, 2015)

그러나 나태주 시의 매력은 읽을수록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위험하기까지 한 그 솔직함에 있다. 꽃이라는 서정성 있는 소재에 솔직함을 입힌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힌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시인은 점잖게 무게를 잡으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철없는 어른, '어린 아이'가 말하는 사랑은 결코 음탕하지 않다.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
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꽃.7, 2011)
교장 선생님까지 하고 정년퇴직한 시인은 장광설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에 걸렸던 '풀꽃'이 아니었다면 눈길이나 끌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교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속에 삶의 지혜가 있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2, 2010)
젊은 날 숫기가 없어 연애 한 번 제대로 했을까 싶은 시인은 "사람을 믿기보담은 나무를 더 믿고 살기로 했다"고 심경을 읊은 바 있다(처세, 1974). 시인의 그런 성정은 "사람아, 내가 너를 두고 꿈꾸는 이거, 눈물겨워하는 이거, 모두는 네게로 가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한 방법쯤인 것이다."(봄날에, 1975)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쉽게 변하지 않았던가 보다. 그래서 시인은 책과 사귀며 평생을 시에 몰입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시인의 숫기 없음이 독자들에겐 축복인 셈이다.
사람 사귀기 어려워 책과 사귀고
여자하고는 더욱 어려워 난을 보러 다닌다
분재원에서 만난 겨울나기 봄꽃들,

꽃들도 푸스스하니 어깨 처져 있었다. (꽃집에서, 1983)
'꽃' 말고는 한 눈 팔지 않았던 나태주 시인의 시세계는 한결 같다. 종교적이라 할 정도로 지순하다. 작고 여리며 화려하지 않아 눈 여겨 볼만한 것들이 없는 꽃조차도 그에게는 우주를 담고 있어 놓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시에서는 종교적 심성을 느낄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아무렇게나 저절로
피는 꽃은 없다

누군가의 억울함과 슬픔과
기도가 쌓여 피는 꽃

그렇다면 산도 바다도
강물도

하늘과 땅의 억울함과 슬픔과
기도로 피어나는 꽃일 것이다 (꽃.5, 2010)
평생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람과 자연을 노래한 시인의 시는 담백하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한 작위적인 도전도 없고, 가식은 더더욱 없다. "적막한 들판 오로지 늬들 땜에 자랑차누나"(애기똥풀1. 2000)라며 풀꽃을 자랑스러운 친구로 노래한 시인은 난해하여 외면당하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과 다른 결을 갖고 있다.

다만,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시인의 긍정성이야 그렇다 치지만, '적막한 들판'을 한 평생 일구고도 빚에 허덕이는 농군들의 현실은 눈감은 게 아닌지 묻게 한다. 지나치게 멀리 서서 바라보며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평생 서정성을 표현해 왔던 시인에게 이런 기대를 말한다면 일탈을 부추기는 게 아닌지 저어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풀꽃 시인, 나태주는 명색이 25년 이래 광화문을 가장 뜨겁게 달군 시인이 아니던가. 시민이 선택한 시인은 결코 무게를 잡지 않으면서 "나도 너에게 좀 더 가벼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영산홍, 2013)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고백처럼 좀 더 가벼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시인이 "네가 보고 싶지 않아졌다"고 꽃을 던지는 모습을 기대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그가 거리에서도 사랑받는 국민 시인이었으면 좋겠다.
네가 좀 더 보고 싶지 않아졌으면 좋겠다

바람에 부대끼다가
통째로 모가지 떨구고
모래밭에 뒹구는
붉은 꽃들의 허물

나도 너에게 좀 더 가벼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영산홍, 2013)



별처럼 꽃처럼

나태주 지음, 푸른길(2016)


태그:#나태주, #풀꽃, #광화문 교보문고, #볓처럼 꽃처럼, #꽃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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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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