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환호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정부 부서 앞에 오물을 투척하고, 마트를 습격해 터무니없는 물건 값을 고친다. 프랑스의 '흔한' 시위 모습이다. 경찰 차벽 근처에만 가도 경고 방송과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한국의 집회 현장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연일 집회가 이어지면서 시위 방식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생경한 시위 문화를 담은 영상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연수씨가 지난 20일 유튜브와 개인 SNS에 올린 '프랑스의 시위 모음'이란 제목의 영상이다. 이 영상은 23일 오전 현재 3만 2천회 조회, 945회 공유를 기록(김씨의 개인 SNS 포스팅 기준)했다.
이 유쾌한 시위 독려 영상, 어떻게 만들게 됐을까. 22일, 이메일을 통해 김연수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김씨는 "SNS를 통해 (한국에서 시위 방식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이 영상을 통해 '프랑스는 이렇게 시위하더라. 그래도 괜찮더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씨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
-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현재 프랑스 낭트(Nantes)에 살고 있고, 언어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진로를 좀 바꿀까 생각하고 있지만요. 프랑스에 온 지는 이제 3년이 돼가요. 그 전엔 서울에 사는 대학원생이었고 남편은 대기업에 다녔습니다. 사는 게 지루하고 고달팠어요. 2012년 대선 결과에 좀 절망하기도 했고. 그래서 다른 나라는 어떤지 가서 살아볼까 했지요. 처음엔 겁도 많이 났는데, 이리저리 치이고 부딪치면서 다행히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답니다."
- 지난 20일 유튜브에 올린 '흔한 프랑스 시위 모음'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영상을 만들게 되었나요."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프랑스는 이렇게 시위하더라. 그래도 괜찮더라.' 2009년쯤인가, 한국에서 하종강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덕분에 노동, 노동자에 대한 제 생각이 많이 달라지게 됐죠.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에서는 교수, 의사 같은 직종의 사람들도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한다', '학교에서 노사협상에 대해서 배운다'고 설명해주셨는데, 좋아 보이면서도 그 땐 좀 거짓말 같았어요. 그런데 프랑스에 와서 보니 정말로 그렇더라고요. 이걸 영상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시위는 '불편', 그렇지만 - 영상에는 한국에선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방식의 시위 모습이 담겨있는데요. 실제 프랑스에 살면서 직접 목격한 집회/시위의 분위기는 어땠나요."일단 프랑스에서는 집회/시위가 굉장히 자주 있습니다. 불편하고, 약간은 무섭기도 합니다. 절대 평화롭기만 하지 않아요.
불편하다는 것은 보통 대중교통이 파업했을 때 그래요. 올해 초부터 약 6개월이 넘도록, 프랑스 정부의 노동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정말 대단했습니다.(결국 총리가 국회 동의 없이 통과 시켰습니다.) 제가 사는 낭트에서도 목요일마다 대규모 집회가 있었어요. 그때마다 대중교통이 마비돼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대학에선 학생들이 캠퍼스를 점거·봉쇄해서 실제로 수업이 많이 취소됐고요.
집회 자체도 한국보다 훨씬 폭력적입니다. 일단 시내의 유리 진열장은 박살이 나는 곳이 많고, 버스 정류장이나 쓰레기통 등 공공 기물 파손도 상당합니다.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도 많이 하고요. 저는 도시 중심에 살고 있어서 경찰-시민 대치 지점을 가로질러 다닐 때도 많았는데요, 최루탄에 공포탄에... 거의 전쟁통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강제진압을 한다거나 집회 참가자가 잡혀가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매번 도시 기물파손이 심각한 것에 대해서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런 일이 워낙 잦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사자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시위나 집회로 인한 불편함을 감당해내는 수용치, 즉 이해력이나 인내심이 전반적으로 높은 것 같습니다."
- 프랑스에서 목격한, 가장 인상 깊던 집회/시위 장면이 궁금합니다."제가 사는 도시 근처에는 노트르-담-데-렁드(Notre-Dame-des-Landes)라는 지역이 있어요. 신공항 건설 문제로 몸살을 앓다가 결국 최근엔 주민투표까지 한 지역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 분쟁의 역사가 50년이나 됐다는 거예요. 신공항 건설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무려 50년 동안이나 대치 중이고, 아직까지도 공항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이라면 벌써 50번도 더 지었을 거예요.
관련 집회에도 한 번 가봤어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가자들 간의 '소통'이었어요. 한국에서는 시위를 하면 자유 발언을 통해서 몇몇 개인이 발언하는 것은 들을 수 있지만 바로 옆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일은 드물잖아요? 그런데 이곳에선 집회 참가자들끼리 여기저기 모여앉아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찬성, 반대, 발언권 등 다양한 수신호도 만들고, 마치 게임처럼요. 그렇다고 다들 말을 잘하고, 엄청 기발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별 결론 없이 싱겁게 끝날 때도 많죠. 그렇지만 그 자체가 참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어요."
- 최근 한국에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광화문 광장에 100만 명의 시민이 모였고, 매주 집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집회 방식/형태에 대한 다양한 논쟁(폭력-비폭력, 평화시위 프레임 등)이 오가고 있는데요. 이 논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저도 SNS를 통해서 그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일단 논쟁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시위가 우리 삶에 더 가까워졌고,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지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저는 한국의 시위 문화는 그만의 고유한 색깔이나 형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시위 문화가 꼭 다른 나라의 모습을 본떠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는 방식은 아마도 더 효과적일테니까요.
그렇지만 조금 더 화내도 된다고는 생각해요. 우리가 화를 덜 내서 이런 사회를 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열 받는다고 당장 주먹부터 휘두른다면 폭력이겠지만, 어떤 장소를 점거하고, 불편을 끼치고, 경제적인 피해를 입히는 등의 집단 행동 그 자체는 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이니까요. 고위 공직자들의 엄청난 비리와 거짓보다 그것을 규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종이 쓰레기가 더 마음에 쓰인다면, 뭔가 뒤바뀐 것은 아닐까요?
또, 시위 방법에 대해서 딱 한 가지로 의견일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지지하는 방식의 시위에 참여하면 되는 거니까요."
"재치있는 한국의 시위... 좀 더 화내도 괜찮아요"
- 언론은 '경찰 차벽에 붙였던 꽃 스티커를 떼는 시민'들에 주목하고, 경찰은 '폭력' 시위를 하지 않는 시민들을 칭찬합니다. "보도 블럭까지 다 깨부수는 프랑스의 시위에 익숙해져 있다가 이런 기사를 보면 정말이지 깜짝깜짝 놀랍니다. 시위 후에 쓰레기를 줍는 것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일인데, 붙였던 꽃모양 스티커까지 다시 떼셨다는 걸 보면서 감탄과 실소가 동시에 나왔습니다. 이곳의 기준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착한' 시민들이에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이 그 시위가 폄하되었으면 저렇게까지 할까 싶어 안쓰럽기도 합니다. 물론 시위 후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청소노동자들이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청소노동자들이 그런 고생을 안 하게 하려면, 매번 그렇게 시위를 나오도록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면 됩니다."
- 영상 제일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직 한국에선 집회/시위 등 정치적 표현 행위를 불편해하는 시선이 존재합니다. 영상을 보면, 프랑스는 한국과 상당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점에서부터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요."역사·사회적 경험과 교육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 68혁명 등 권력에 저항해서 승리한 여러 역사적 경험이 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은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지요. 또, 다양한 직업군과 나이대의 사람들이 수시로 파업/시위에 참여하기 때문에 타인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도 쉽게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도 유익하고요. 실제로 제가 동영상 끝에 삽입한 영상도 '시위가 뭔가요?'라는 10살짜리 아이의 실제 질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쓰여 있어요. 그만큼 어릴 때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거겠죠."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여러 문제점이 해결될 때까지 광장의 집회는 계속 이어질텐데요. 시민들의 정치 참여 활동이 보다 활발하고 건강하게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지금 이미 너무 활발하고 건강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피켓이나 그림도 너무 재치있고요. 한국의 시위 문화 색깔 중 하나가 이런 풍자의 유쾌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집회에 많이 참여하던데, 학교나 가정에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 집회의 의미나 민주주의에 가치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잘 가르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가 또 자라나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