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페이스북에 누군가 글을 썼다. '카스트로'가 죽었다고. 순간, '어? 카스트로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혼자 막 민망해진다. 쿠바를, 쿠바혁명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쿠바의 수장을 50년 넘게 맡았던 카스트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니.
모르는 건 부끄럽지 않지만 모르는 걸 알려고 하지 않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누가 그랬지. 책장에 꽂은 지 한참 지난, 아직 읽지 않은 카스트로 연설 모음집 <들어라! 미국이여>(피델 카스트로 지음, 강문구 옮김, 이창우 일러스트, 산지니, 2007)를 얼른 꺼낸다. 그리고 또 한 권,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일구어 낸 '체 게바라', 그이와 너무 잘 어울리는 빨간색 책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0)도 함께.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끈 뒤에 한 사람은 아흔 살까지 살았고, 또 한 사람은 서른아홉 살에 세상을 떴다. 카스트로의 죽음 앞에, 혁명의 열매를 맛보기보다는 새로운 혁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길을 떠난 체 게바라가 저절로 떠오른다. 카스트로는, 더 넓은 혁명을 꿈꾸며 먼저 세상을 떠난 뜨거운 혁명 동지 체 게바라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았을까. 마구 궁금해진다.
쿠바혁명은 국민을 위해 이런 일을 했다 <들어라! 미국이여> 첫 장은 유네스코 전 총재 '마요르'가 카스트로를 인터뷰한 글을 담았다. 유네스코 총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어쩌면 그렇게 마음에 드는 질문만 꼭 짚어서 했던지. 예를 들면 이런 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0년이 된 지금,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아직도 의미가 있는가?"(17쪽) "이렇게 오래 버티는 이유는 무엇인가?"(20쪽) 질문은 이렇게 곧바로 파고들어야 좋다. 빙빙 에두르지 말고.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 오늘날 사회주의가 더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확신한다." (17쪽) "국민과 더불어, 또 국민을 위한 쉼 없는 투쟁과 노동 때문이다. 우리가 신념을 가지고 행동해 왔다는 사실, 우리가 인간을 신뢰하고, 우리 조국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고자 했던 신념이 그 해답이다. (…) 우리는 정치 및 행정상의 최고 책임을 맡고 있는 자들의 지고지순한 정직을 믿는다. 우리는 정치를 경건한 의무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20쪽)단도직입 물음에 굵고 선명한 대답. 특히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의 지고지순한 정직을 믿는다'는 말이 서럽게 다가온다.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선 감히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말이기에. 카스트로의 단호한 목소리에 젖어들면서 어느새 희미해진 것도 같았던 '꿈' 하나가 슬금슬금 고개를 내민다.
늦은 밤, 남몰래 읊기에도 너무나 벅찬 그 말, '사회주의' 그리고 '혁명'. 1959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새로운 사회를 연 쿠바. 50년 넘게 여전히 혁명 체제를 이끌고 있는 이 나라. 그 혁명의 결과가 구체로 어떤 모습인지 카스트로의 목소리로 좀 더 들어봐야만 하겠다.
"나는 우리가 가난하지 않다거나, 우리에게 부족한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가난과 재산을 가능한 한 공평하게 분배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103쪽)"기초약품 가격은 40년 이전의 1959년 가격과 같습니다. 1959년에, 가격을 절반으로 인하했는데, 그것은 혁명이 이룩한 첫 번째 업적 중 하나였습니다. 필요한 사람들은 병원에서 무상으로 약품을 제공받습니다. 심장이식, 간이식, 또는 고비용의 수술이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도 약품은 언제나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혁명은 국민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103쪽)"42년의 혁명기간 동안 쿠바에서는 국민을 향해 단 한 차례의 최루탄 가스도 사용한 적이 없고, 국민을 진압하는 폭동 진압기구, 말이나 무장한 차를 이용한 경찰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 여러분은 쿠바 내 어디든지 여행하면서,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단 한 건의 증거라도 찾아보기 바랍니다. 혁명정부가 그러한 행동을 지시했다거나 눈감아 주었다는, 단 한 건의 사례라도 있는지 찾아보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단 한 건이라도 발견한다면, 나는 다시는 대중 앞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196쪽)아직은 우리에게 '꿈'처럼 여겨지는 무상의료. 쿠바는 진짜로 하고 있다. 쿠바에만 그치지 않고 다른 여러 나라들에도 무상의료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집도 무상이고, 쿠바에 유학 온 다른 나라 학생들도 무상교육을 받는다. '혁명은 국민을 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고, '혁명정부의 잘못된 모습을 단 한 건이라도 발견한다면 다시는 대중 앞에 서지 않겠다고' 말하는 노 혁명가 카스트로.
진실 여부는 더 자세히 따져봐야겠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정치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쿠바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부러우면 진다고 하던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부러우니까 자꾸 '꿈'을 꾸게 된다. 저런 세상에 살고 싶다고, 저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나는 신념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입니다.""가장 고귀한 원칙 중 하나는 연대의 원칙이므로 우리는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공동의 비극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고귀한 감정에의 잠재력, 그리고 선행과 이타주의에 대한 능력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우리가 쿠바의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아이티, 과테말라, 도미니카공화국, 푸에르토리코, 아프리카, 세계 모든 나라 어린이들의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한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지고의 정신을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98쪽)"도덕과 명예로운 행동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 나는 여러분에게 단 하나의 원칙과 나의 생명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단 한 번의 불명예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단 한 번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121쪽)"나는 신념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입니다." (152쪽)연설문을 따라갈수록 심장이 자꾸만 뛴다, 뜨거워진다. '연대, 이타주의, 도덕, 신념,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마음에 작은 불씨로 여전히 살아 있는 말이었다, 행동이었다.
책 한 권 읽는 것으로 꺼진 것만 같았던 그 불씨들이 다시금 꿈틀거릴 줄이야. 저도 모르게 뜨거워진 마음이 <체 게바라 평전>마저 자꾸 들춰보게 이끈다. 오래전에 읽으면서 밑줄 좍좍 그었던 문장들이 새롭게, 벅차게 다가온다.
"혹시 여러분이 우리의 혁명이 공산주의 혁명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정의를 내리겠습니다. 우리의 혁명은 우리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표지판을 설치했던 그 길을 찾아냈다고 말입니다." (472쪽) "혹시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은 물리학자에게 뉴턴주의자냐고 묻는 것이나 생물학자에게 파스퇴르주의자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인간들의 지식에 너무도 깊숙이 침윤해 있어 이견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익숙한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490쪽)"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된다. 이 특질이 결여된 진정한 혁명가를 상상할 수는 없다. 정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 중 하나도 이것이다. 냉정한 정신과 열정적인 정신을 조화시킬 줄 알아야 하며, 눈 하나 꿈쩍 않고 고통스런 결정을 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전위 혁명가들은 민중에 대한 이런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547쪽) '혁명'과 '사랑.' 형체 없는 두 정신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불길은 얼마나 높이 치솟을 것이며, 그 온도는 또 얼마큼이나 뜨거울까. 평전에 담긴 체 게바라의 목소리를 글로 옮기는데, 혁명과 사랑이 한데 어우러진 불길이 내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듯 마음이 뜨겁게 녹아내린다. '대통령'과 그 옆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가진 자'들이 희롱하고 있는 지금 이 나라에 대한 분노, 원망들이 잠시나마 사라지는 듯하다.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당신이 쿠바의 수반으로서 지고 있는 책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작별하여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희열과 고통이 어지럽게 내 마음을 휘젓는군요. 여기에 나는 건설자로서 나의 가장 순수한 희망을 두고 갑니다. (…) 또 다른 하늘 아래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바로 쿠바 국민, 특히 당신에게 향할 것입니다."(556~557쪽) 쿠바를 떠나 혁명 게릴라군을 이끌다가 서른아홉 나이에 총살로 생을 달리한 체 게바라. 그이가 쿠바를 떠나기 전에 카스트로에게 남긴 편지를 읽는다. 한껏 차오른 눈물은 끝내 흘러내린다. 체 게바라가 최후의 순간에 떠올렸을 그 사람, '카스트로.' 체 게바라를 가슴에 묻고, 어느 때건 그이의 영혼과 대화하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쿠바에서는 자산이 고위 관리직의 손으로 흘러들어 가는 일은 결코 없으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개인에게 흘러들어 가는 일은 결코 없다'고 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카스트로도, 어쩌면, 죽기 전에 다른 누구보다 체 게바라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유네스코 전 총재 마요르는 카스트로에게 묻는다. "세계지도를 보면 당신은 어떠한 변화를 이루고 싶은가?" 카스트로는 대답한다.
"지나치게 부유하거나 낭비적인 국가도 없고,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국가도 없는, 인간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계를 그리고 싶다. (…) 내가 그리는 세계가 자본주의 철학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세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카스트로의 대답을 읽으며 방구석에 있는 먼지 가득한 지구본을 들여다본다. 저 멀리 작게 쿠바가 보인다. 지구본을 한 바퀴 돌린다. 온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믿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는다. 카스트로의 대답을, 그 신념과 행동을.
"들어라, 자본주의여! 물러나라, 대통령이여!" 박 대통령 3차 담화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떨리고 조마조마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하는 말이 왠지 나올 것만 같은 어설픈 기대감과 믿음 때문에. 어이없는 담화가 끝나고, 쓸데없이 두근거렸던 내 심장을 탓했다.
'너, 왜 이렇게 아직도 순진해!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내가 저 사람 때문에 잠시나마 두근거렸다니, 쪽팔려, 억울해!' 대통령이, 권력자들이, 사람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자꾸 흐리게 만드는 이 나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카스트로는 말한다. "역사를 통틀어 인간은 꿈, 즉 영원히 존속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 게바라도 말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꾸었던 꿈은, 그들만의 꿈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꿈꾸었고 계속 꿈꾸어야 할 '혁명'이자 '사랑'이다.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낸 두 사람을 책으로 만나며 깨닫는다. '나는 아직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나니 이제 좀 숨 쉴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행복한 꿈에 빠져들 기운도 생긴다. 카스트로가 남긴 연설 한 구절을 조금 바꾸어서, 미리 행복한 잠꼬대를 읊어 본다. 아니, 모든 사람들과 함께 큰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저 청와대 깊숙한 곳까지 들릴 수 있게끔. 카스트로를 추모하는 마음까지 한가득 담아서.
"들어라, 자본주의여! 물러나라, 대통령이여! 우리는 인류의 각성과 투쟁을 확신한다! 우리는 정의의 사상을 믿는다! 우리는 진실을 믿는다! 우리는 인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