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빳빳하게 고개 들고 살아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불쌍한지 아느냐.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인물이 되고 튼튼한 나라 만들어라. 다른 나라에 고개 숙이는 백성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故) 박숙이 할머니가 청소년들한테 했던 말이다. 1922년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당마을에서 태어났던 박 할머니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시다가 6일 저녁 눈을 감았다.
이제 박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큰 울림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지난 11월 28일 병상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만나 뵈었던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 대표는 "너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고, 그 분이 남긴 가르침은 너무 크다"고 말했다.
16살에 끌려가 ... 가슴으로 낳은 자식 키워
박숙이 할머니는 1939년, 나이 16살 때 일본에 끌려갔다. 한 살 위 이종사촌과 바닷가로 '바래'(조개캐기) 가는 길에 잡혀갔다. 할머니는 일본군인 2명이 두 처녀의 목에 칼을 겨누며 막무가내로 트럭에 태워 끌고 갔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두 처녀는 남해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끌려갔다. 일본 나고야로 끌려간 처녀들은 창고에서 주먹밥으로 사나흘 동안 지냈다. 당시 같이 끌려 왔던 조선 처녀들이 "간호사 시켜 준다고 하더라"고 하길래, 박 할머니도 그런 줄 알았다.
며칠 뒤 박 할머니는 중국 상하이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히로꼬'라는 이름으로 22살까지 위안부 생활을 강요 당했다. 자살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구타를 당했고, 그 때 입은 상처의 흔적이 평생 몸에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해방이 된 줄도 몰랐다고 한다. 위안소로 온 일본군인이 "우리가 전쟁에 져서 조선놈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해방이 된 줄 알았다.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2년간 중국인 홀아비 집에서 지내며 틈틈이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도망을 쳤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온 할머니는 곧바로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할머니는 목욕탕 집에서 가정부 생활을 3년간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다녔던 절 이름이 생각났고, 그 절이 남해에 있다는 사실을 안 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향을 떠난 지 10여년만인 1948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부모님들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할머니는 고향 사람들한테 위안소 생활을 밝힐 수 없어 부산에서 식모살이를 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이 낳은 아들 한 명과 두 딸을 '가슴으로 낳은 자식'으로 여기며 키웠다.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2007년이었다. 그 때 텔레비전을 보다가 다른 피해자의 증언을 보고 결심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가슴으로 낳은 아들한테서 얻은 손자손녀 3명이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주변에 알리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묻고 다니던 할머니는 이경희 대표와 연락이 닿았다.
연락을 받은 이경희 대표는 그날 밤에 남해로 갔다고 한다. 이 대표는 "처음에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 순간, 위안부 피해자가 맞다는 생각을 했다"며 "연세가 많은 상태로, 남해군청과 여성가족부에 빨리 신청 등 절차를 밟도록 했다"고 말했다.
박숙이 할머니는 2011년 여성가족부에 신청했고, 6개월간의 심사 과정을 거쳐 2012년 피해자로 등록이 되었다.
이후 할머니는 적극 나섰다. 특히 청소년 교육이 중요하다고 봤다. 박숙이 할머니는 2014년 남해여성회와 함께 '찾아가는 강연'을 벌였다. 남해고, 남해정보고, 남해중 등을 다니며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할머니 들려주세요'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할머니는 학생들한테 "일본한테 사과를 받아야 한다"거나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당시를 살았던 나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은 모두 나라가 없어져 생긴 것이다"라 말하기도 했다.
남해여성회 김정화 대표는 "할머니는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강연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할머니를 안아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할머니는 장학금도 내놓았다. 2013년 10월 남해군청을 방문했던 박 할머니는 정현태 전 군수한테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어려운 형편에서 열심히 향학열을 불태우는 후학들에게 뜻있게 써 달라"고 말했다.
'숙이공원' 조성... 7일 저녁 추모식, 8일 장례식
남해사람들은 박숙이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다. 남해군은 남해여성인력개발센터 앞에 '숙이공원'을 조성했다.
우리 옷을 입은 소녀상 옆에 바래갈 때 사용하는 바구니와 호미를 넣어 박 할머니를 형상화한 소녀상을 세워놓았다. 2015년 8월 14일 열린 제막식에 박 할머니는 건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제막식 때, 박 할머니가 일본경찰에 끌려갔을 때 나이인 16살의 소녀가 헌시를 낭송했다.
헌시는 "호미랑 소쿠리 끼고 바래 가던 날 난 너무도 참혹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남의 땅 낯선 사람들 발길에 무참히 짓이겨지고 말았다 …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허울만 커다랗게 그리 오리 마라. 그저 한 평생 서럽던 내 마음 따뜻한 가슴으로 훑어 내려 줄 그런 마음으로 오너라. 여기 숙이공원에서 이렇게 꼿꼿이 기다리고 있을구마"라고 되어 있었다.
박숙이 할머니가 숙이공원을 찾은 때는 올해 5월 20일. 할머니의 생일에 맞춰, 박영일 남해군수가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같이 둘러본 것이다.
당시 박 할머니는 "니도 숙이가? 내도 숙이다"거나 "바구리(바구니), 바구리다, 호메이(호미)", "좋다, 참 좋다"라 말했다고 남해군청은 전했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던 박 할머니는 한때 호전되었다가 최근 폐렴으로 다시 입원했고,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이경희 대표는 "지난주 찾아뵈었을 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셨고, 그래도 나올 때는 손을 흔들어 주셨다"며 "일본에 이기고 사과를 받아내야 하며 자존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고 말했다.
빈소는 남해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8일 오전 장례식이 열린다. 남해여성회 등 단체들은 7일 오후 7시 빈소에서 추모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