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시인님 어디십니까? 광화문에 지금도 계십니까?""아,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광화문에 있습니다만 지금은 대치동에 일이 있어 나왔습니다.""아, 그러시면 오세요. 식사라도 따뜻하게 하고 가세요."특검 사무실에 들렸을 때 대치동에서 남도음식 전문점 '고운님'을 운영하시는 정춘근 사장께서 전화를 주셨다. 그런데 일행이 3~4명이라면 모를까 20여 명의 인원이 우르르 몰려가기엔 무리다 싶어 특검 사무실 근처에서 식사를 한 뒤 2시 무렵 인사나 나누러 들렸다.
들어가기 전 전화를 먼저 했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안에 계시나요?""아, 정 시인님 제가 급한 연락을 받고 일산 창고에 왔습니다. 식구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습니다. 제가 오늘 좀 늦을 것 같습니다. 들어가셔서 편하게 드시고 가세요."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심식사 시간이 지난 뒤라 식당엔 손님이 별로 없다. 특별히 요일별로 점심을 따로 준비해 8000원에 내는데 반찬들이 다른 식당에 비해 맛깔 지니 빈자리가 없어 줄을 설 때가 많다.
일 하시는 분이 고개를 갸웃 하더니 "강원도에서 오신 정 선생님이시죠?"라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자리를 안내하고 곧장 반찬과 음식부터 가져왔다. 그런데 혼자 먹을 양이 아니다. 4명이 앉을 자리를 미리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다.
"저 식사를 하고 왔습니다. 사장님께 인사나 드릴 생각이었는데 소주나 한 병 주세요.""그러시면 굴은 포장을 해드릴 테니 가져가시고 꼬막으로 안주를 하세요."꼬막을 데쳐 회로 먹는 건 사실 이곳 고운님에서 10년 전에 처음으로 배웠다. 그때까지는 꼬막하면 무조건 껍질을 깐 뒤 양념장을 얹어 만든 반찬으로만 알고 있었다. "겨울철 별미로는 벌교꼬막과 남해의 굴이 아주 좋습니다"라며 정춘근 사장께서 매생이국으로 식사를 한 뒤 술 한 잔 하자며 권해서 회로 먹게 됐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더니 이내 그 맛을 찾아 인사동이나 통의동에서 몇 사람 어울릴 때면 권하게 됐다.
적당히 간간하면서 갯내 물큰한 벌교꼬막을 데침으로 별다른 양념 없이 먹는 맛은 남녘의 해풍과 갯것 그대로의 향으로 맛 봉우리들을 요동치게 한다.
완도나 벌교 너른 벌판을 나가 본 이라면 그곳의 질박한 향취를 잊지 못할 것이다. 부모가 어부요. 혹은 농사꾼이었다면 그 질박한 삶의 테두리 속에서 맛보던 향수(鄕愁)가 그리움 되어 전신을 휘감는 맛의 원천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강남구에 가면 몇 곳 그런 토속적인 음식을 낸다고 하는 식당들이 저마다 다양한 얼굴로 길손을 맞는다. 그 중에서도 먼저 한 번 들려보곤 이내 그 집의 주인과 식구들의 정감어린 접대를 잊을 수 없어 곧잘 찾게 된 곳이 이곳 '고운님'이다.
고운님! 사립짝 너머로 혹여나 고운 우리 님 오실까 깨금발로 동구 밖을 살피는 얼굴 하나 있음직한 옥호다.
우린 여전히 가슴 속엔 저마다 고향에 대한 염원들이 있다. 앞 냇가엔 시냇물 돌돌거리고, 송사리 떼를 쫓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함 같은 투박하면서도 목가적인 그런 고향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건 도시의 삭막함에 대한 보상심리의 발로겠으니 우리들의 고향도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라 이젠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짓는 풍경도 만나기 어렵다. 자연히 저녁밥 짓는 연기가 굴뚝으로 나올 까닭 없건만 그걸 상쇄라도 시켜 줄 그런 대상을 갈망하게 됐다.
장독대에 핀 봉숭아가 마치 어린 누이의 손톱을 곱게 물들이고 금방이라도 모시한복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투박한 사발을 들고 된장을 뜨러 나오실 듯싶은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 대상을 갈망한다.
소주 한 병 거의 비워갈 때 다시 전화가 왔다.
"정 시인님 제가 있었어야 하는데 불가피하게 창고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창고를 옮기는데 늦게까지 작업을 해야 됩니다. 조만간 우리 다시 한 번 만나서 저녁이라도 먹으며 인사 나누시죠. 추운 광장에서 노숙하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따뜻한 식사나 나누시자고 해 놓고 자리를 비워 정말 미안합니다."이건 내가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데 오히려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게 되어 미안하다며 조만간 다시 만나자니 이만한 생각을 지닌 정춘근 사장님의 인품에 다시 탄복하게 된다. 블로그와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글을 보고 광화문 광장에서 노숙한다는 걸 확인한 정춘근 사장께서 따뜻한 식사라도 나누자고 마음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식사도 안 하시고… 사장님이 미리 말씀해 두셨어요. 계산 절대로 안 된다고요."오랜만에 묵은지볶음과 동치미 등 좋아하는 반찬에 벌교꼬막으로 소주 한 병 마시고 나서는데 도시락에 포장한 굴을 챙겨준다.
"사장님께 고맙다는 인사 전해주세요. 조만간 편한 맘으로 인사하러 다시 들리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