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6일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를 전면 반박하는 답변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박 대통령의 대리인단이 헌재에 제출한 답변서는 총 24페이지로 국회의 탄핵 사유를 전면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리인단 단장을 맡고 있는 이중환 변호사는 브리핑을 통해 "헌법 위배 부분은 그 자체로 인정되기 어렵고, 법률 위반 부분은 증거가 없어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답변서를 통해 자신을 최순실 국정농단의 공범이라 적시한 검찰 수사 내용을 전면 부정했다. 이는 즉각적인 퇴진을 촉구하는 수백만 촛불민심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촛불에 담긴 준엄한 뜻을 깊이 새기겠다면서 뒤에서는 시민의 뒷통수를 후려칠 궁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뻔뻔하고 저열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박근혜 정부 4년의 국정 난맥과 혼란이 이 장면 하나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국회에서는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한창이다. 그런데 국조특위 청문회에서 특위위원들과 증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표현이 하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지난 4년을 돌이킬 때 사용하는 "이제 와서 보니"라는 표현이 그렇다.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정황들이 '이제 와서 보니' 이해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이제 와서 보니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들고나온 선거전략이, 후보검증 과정에서 불거졌던 역사관 및 과거사 논란이, 각종 복지공약이, 대선후보 TV토론에서의 무지와 선문답이, 국정원 사건에 대한 초헌법적 반응이, 어안이 벙벙했던 각종 말실수와 유체이탈 화법이 저절로 이해가 된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의 인사 논란도, 공약 파기도, 세월호 참사도, 비선에 의한 국정농단도 모두 이해가 간다.
이제 와서 보니 그랬다. 역사관 및 과거사 논란은 시대착오적인 국정교과서의 복선이었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줄 모르고 남발한 복지 공약은 대선공약 파기의 전조였고, TV토론 당시의 무지와 선문답은 국정운영의 난맥을 예고하는 암시였다. 국정원 여직원이 '감금'됐다고 핏대를 세우던 장면은 민주주의와 법치의 퇴행을 알리는 서막이었고, 시도 때도 없는 말실수와 유체이탈은 대통령의 무지와 자질 부족을 알려주는 명징한 표시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의 행태들도 이제 와서 보니 모조리 납득이 된다. 각계각층의 비판에도 끝내 고쳐지지 않던 인사 논란은 대통령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표징이었고, 각종 대선공약의 파기는 대통령의 원칙과 신뢰가 얼마나 조악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신호였다. 온 사회를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던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의 무능과 무책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참극이었고,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던 대한민국의 비정상성도 비로소 수긍이 간다. 이 나라를 짓누르던 비이성과 몰상식, 불의와 무책임, 부정·부패, 불공정이 '최순실'과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박 대통령의 콜라보에 의해 모두 설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보니 이 모든 것에 미증유의 인물인 '최순실'과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탁한 박 대통령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결백하다는 대통령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욱 참담하고 끔찍한 것은 지난 4년 동안 대한민국을 비정상적으로 이끌어온 당사자가 여전히 자신은 결백하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헌재에 제출한 답변서를 통해 탄핵 사유를 전면 부정했고, 국조특위의 청와대 현장조사마저 "이미 기관보고를 통해 각종 의혹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부했다.
박 대통령의 약속은 다시 뒤집어졌다. 1~3차 대국민담화 당시 박 대통령은 의혹의 진상과 책임 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눈물까지 내비쳤던 그의 약속은 이번에도 거짓이었다. 이 모습은 박 대통령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이율배반적 행태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탄핵까지 당했음에도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벌써 2달째 광장을 뜨겁게 밝히고 있는 촛불은 이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 불법과 부정, 특권과 특혜의 타파를 부르짖는 시민사회의 여망을 대변한다. 촛불은 낡은 구체제로 상징되는 '박근혜 공화국'에 대한 종언 선언이다. 시민이 주권자임을, 이 나라의 근본이요 권력의 중추임을 드러낸 사건이다. 1960년의 4·19혁명, 1987년의 6월항쟁을 뛰어넘는 사회변동 운동의 정점을 찍은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단호히 부정했다. 외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헌법과 법치를 훼손한 것도 모자라 제 한 몸 살아보겠다고 끝까지 발바둥치고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시민사회의 강렬한 에너지에 맞서 온 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도 자존심도 다 벗어 던진 모양새다. 오직 권력유지에 대한 본능과 욕망, 집착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러나 민의를 거스르는 권력자의 종착지는 결국 한 곳이다. 시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를 역사가 좌시해오지 않는 탓이다. 민심의 거대한 파도에 맞서고 있는 박 대통령이라고 다를까. 공동체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 공동체의 강렬한 염원을 외면하는 권력자의 최후는 언제나 같다. 역사에는 예외도, 관용도 없다. 박 대통령의 오만과 만용에서 비극을 예감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국민뉴스와 필자의 블로그 '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