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촛불' 이상으로 대중의 역량이 강하게 폭발한 적이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였다. 그때는 한양 주민들이 불과 하루 만에 정권을 전복했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는 10월 29일 제1차 촛불집회 41일 만인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다. 이에 비해 1882년에는 평화 시위가 시작된 지 하루 만에 고종 임금의 직무가 정지됐다. 순간적 폭발력으로 치면, 1882년이 2016년보다 훨씬 더 강했다.
임오군란은 지금으로 치면 부사관(하사관)들에 대한 봉급 지급 문제에서 촉발됐다. 봉급이 13개월 밀린 상태에서 고작 1개월 치 봉급으로 지급된 쌀가마니를 열어보았더니, 절반은 겨와 모래였고 나머지 절반은 대부분 썩은 쌀이었다.
정권을 잡은 민씨 가문을 비롯해서 상류층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 보니, 당사자인 부사관들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홧김에 쌀 배급소 공무원들을 구타했다가 이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겼다.
그러자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가 열렸고, 정부는 이를 강경 진압했다. 여기에 격분한 군인과 그 가족들이 물리력을 행사하며 저항하자, 평범한 한양 주민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급조된 일종의 시민군이 주요 관청들과 궁궐을 접수했고, 급기야 고종의 왕권이 정지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임오군란은 이렇게 발생했다.
1882년 조선, 시민들이 하루 만에 정권을 전복시키다최근 대한민국에서는, 한두 명의 사회적 약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수많은 대중이 즉각 공감을 표시하고 힘을 보태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우리는 같은 편'이라는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이런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1882년 조선도 그랬다. 1873년에 고종과 명성황후(당시엔 민비)를 도와 흥선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민씨 가문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경제권력까지 독점하려 했다. 뒤이어 1876년에는 일본에 대한 시장개방이 있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중산층의 생활여건이 악화되면서, 조선 사회에서도 양극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로 인해 명성황후와 민씨 가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1882년 상반기에는 미국에 대한 시장개방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신경이 극도로 민감해진 상태에서 부사관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발생하자, 한양 시민들이 공감을 표시하고 힘을 보태면서 임오군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가 열린 날은 1882년 7월 23일이다. 실록상의 음력 날짜는 6월 9일이다. 시민군이 창덕궁을 접수하고 고종의 왕권을 정지시킨 날은 다음 날인 7월 24일이다. 불과 하루 만에 정권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대중이 동시에 들고 일어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 사건은 혁명으로 기록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군란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나의 난(亂) 정도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임오군란이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정권을 전복한 그 파워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은, 한양 시내를 장악한 상태에서 시민군 지도부가 엉뚱한 데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방문한 곳은 지금으로 치면 야당 총재의 집이었다. 1873년에 권력을 잃고 9년째 칩거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 운현궁을 방문한 것이다. 이 날이 7월 23일이었다.
민씨 정권 전복시킨 시민군, 스스로 군대 해체김장손을 비롯한 시민군 지도부가 운현궁을 방문해 대원군을 만나는 장면이 구한말의 정치 비화집인 황현의 <매천야록>에 묘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원군은 호통을 치며 시민군을 내쫓는 척하다가 지도부 핵심 몇 명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대원군이 일종의 '밀당'을 했던 것이다.
은밀한 회담에서 대원군은 시민군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그 직후의 사건 전개를 볼 때, 지시 사항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씨 일파와 주요 관청들을 좀 더 확실히 제압한 다음에, 내일 나를 호위하고 창덕궁에 들어가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인 24일, 대원군은 시민군 수백 명의 호위를 받고 창덕궁에 들어가 고종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정권을 차지했다.
그런데 정권을 잡은 그 순간, 대원군은 시민군의 존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들 덕분에 정권을 잡은 것은 고맙지만, 그냥 두면 혁명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여당인 민씨 세력은 물론이고 자기 쪽도 안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민군을 무력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에 대한 시민군의 분노가 대단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실제로 시민군은 명성황후의 신병을 확보해서 끝을 내고자 했다. 이런 대중의 심리를 활용해서 대원군은 "중전이 오늘 죽었다"고 국상을 선포해버렸다. 중전은 이미 궁궐을 빠져나가 충주로 도주한 뒤였다. 그래서 중전의 시신도 확인하지 못했으면서 서둘러 국상을 선포해버린 것이다.
대원군이 이렇게 한 것은 시민군의 분노를 달래주고 그들을 귀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여인이 죽었으니, 이제 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시민군을 해체하려 한 것이다. 대원군은 속으로는 '너희의 역할은 다 끝났으니 이제는 촛불을 끄고 돌아가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시민군은 공공의 적인 중전이 죽고 고종의 왕권이 정지됐다는 점에 만족하며 대원군의 해산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로써 시민군은 자진 해산했고, 정권은 대원군의 독차지가 되었다.
이것은 시민군과 함께 대궐을 장악한 그 혼란한 와중에도 머리를 수없이 굴린 대원군의 작품이었다. 1863년부터 10년간 고종을 대신해 임금 역할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1882년 당시의 대원군(당시 63세)은 이미 정치 9단이었다. 이처럼 닳을 대로 닳은 대원군과 손을 잡은 결과로, 시민군이 민씨 정권을 전복시켜 놓고도 자신들의 군대를 스스로 해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대원군 정부, 시민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시민군 덕분에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돌아가는 시민들에게 작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이들을 달랠 목적으로 몇몇 개혁 조치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시전 상인,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들에 대한 응징이었다. 대원군은 시전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금지하고 그중 일부를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또 서민들을 괴롭히던 불필요한 세금들도 없애버렸다.
여기에 더해, 시민군에 대한 사면령도 내려주었다. 시민군이 법질서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시민군을 연행하거나 처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만약 시민군이 스스로 해체하지 않았다면, 시민군은 사면령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주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물 같지도 않은 것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촛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간 시민군은 자신들의 성과에 상당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런 만족을 할 만큼 그들이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씨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면 그 밑에서 야당 생활을 한 대원군 쪽도 거기서 거기라는 점에는 주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고 변화의 열기를 꺼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시민군의 힘으로 정권을 잡은 대원군 정부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직무가 정지된 고종이 청나라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파병을 요청하는 것도 차단하지 못했고, 청나라 군대가 인천 상륙 뒤에 한양에 진격하는 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임오군란 한 달 만에 대원군 정부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붕괴하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대원군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민혁명의 열기를 이어나가는 데 주력하지 않고, 민씨 세력에 대한 정치적 응징과 자신의 권력 강화에만 주력했기 때문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권 게임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대원군 정부가 붕괴하고 대원군이 끌려가는 것으로 사태가 끝난 게 아니다. 스스로 촛불을 내려놓고 대원군의 대권 게임을 지켜보던 시민군 주역들도 청나라 군대에 체포됐다. 이들은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인 군기시(군수물자 제조 관청)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의 내정간섭을 받는 조건으로 고종의 직무정지가 풀렸다. 그러자 충주에 숨어 있던 중전도 화려하게 귀환했다. 국상까지 선포됐던 중전이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명성황후가 살아서 귀환하던 날, 옆에서 무녀 하나가 수행하고 있었다. 도피 중인 중전을 격려하고 도와준 무녀였다. 훗날 진령군으로 불릴 무녀였다. 중전 입장에서는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 있는' 소중한 측근이었다. 바로 이 진령군(김민정 분)은 작년 초에 종영된 KBS 드라마 <장사의 신: 객주 2015>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조선 정계, 비선실세 진령군의 수중에 빨려 들어가다그날 이후로 진령군은 중전의 신임을 이용해 국정에 개입하고 인사문제에도 개입했다. 그리고 엄청난 재산까지 축적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장차관급 인사들까지 진령군을 누님 혹은 어머님이라 부르며 아부할 정도였다. 이렇게 임오군란이 진압된 뒤부터 조선 정계는 비선실세 진령군의 수중에 신속히 빨려들어 갔다.
이런 호사를 진령군 본인만 누린 게 아니다. 그의 아들 김창렬도 위세를 과시하고 다녔다. 김창렬은 말을 타고 다니며 위세를 과시한 게 아니라, 당상관(정3품 이상)의 관복을 입고 다니면서 위세를 한껏 과시했다. 진령군·김창렬 모자의 세상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임오군란으로 이익을 본 사람들은 시민군도 아니고 백성들도 아니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도 마찬가지다. 정권을 되찾기는 했지만, 청나라의 간섭을 받는다는 조건이 붙었으므로 크게 이익을 봤다고도 볼 수 없다.
임오군란으로 이익을 본 것은 일차적으로는 청나라였고 이차적으로는 진령군·김창렬 모자였다. 다 잡은 권력을 대원군에게 헌납한 시민군의 오판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임오군란은 죽 쒀서 '최순실·정유라' 좋은 일만 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만약 시민군이 정치권의 대권 게임에 좌우되지 않고 손에서 촛불을 놓지 않았다면, 임오군란은 군란이 아니라 혁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혁명이 아니라 '난'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