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더기 시행령 속에서 시작한 조사관 업무2015년 7월, "누더기 같은 시행령을 통해 세월호 특조위를 무력화하려는 움직임을 저지" 하겠다는, 공무원 지망자로서 다소 '위험한' 자기소개를 했는데도 필자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별정직 조사관으로 채용되었다.
당시 이석태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특조위 설립준비단 및 세월호 유가족들이 줄기차게 싸워왔던 '누더기 같은 시행령'은 세월호 특조위 상부를 정부 고위직 인사들로 채움으로써, 확정적인 위계를 별정직 조사관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논란을 낳고 있었다.
이는 누가 봐도 고의적인 기획으로서, 굳이 파견직 공무원들이 '구사대' 같이 목적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더라도 특조위를 내부에서 컨트롤 할 수 있는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모난 돌도 쓰임이 있다고 하였나. 그런 분위기에서 필자 같은 사람도 한 명쯤은 쓰임이 있었던, 그런 특조위의 시작이었다.
# 사방이 지뢰밭세월호 특조위를 바라보는 언론의 주목도는 예나 지금이나 상당했다.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세월호 특조위를 둘러싼 언론지형이 찬반으로 상당히 팽팽했는데, 몇몇 언론들의 기사는 조사관들의 인적정보 등 내부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도 많았다.
유행하는 말로 '비선'들에 의해 여기저기 바가지가 새고 있던 바람에 자기통제가 큰 덕목으로 인식되는, 참으로 시대를 거꾸로 가는 '역(逆)거버넌스' 현상이 특조위의 초반 분위기를 지배했다. '사방이 지뢰밭'이라는, 특조위 보좌관의 언급이 아직까지도 매우 인상적인 말로 귓가에 맴돈다.
# 이념 편향성이 강한 여당 추천위원세월호 특조위는 여야의 합의체 구조로서, 여야가 각각 5명씩 추천하고 유가족이 3명, 대한변협 2명, 대법원이 2명을 추천하여 총 17명으로 구성되고, 여당 추천인사가 부위원장과 사무처장을 겸직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연정'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놓았다.
다만 문제는 '널리 알려져 있듯' 이헌, 고영주, 차기환, 황전원 등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수준을 넘어 매우 경색된 이념관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여당 몫 위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위원들 간 충돌시 합의보다 차이가 부각됨으로써 언제든지 특조위의 판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때의 판단이 생각보다 더 적중한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약한 고리 치고 들어왔던 새누리당
특조위를 둘러싼 대치선은 늘 예측이 불가능했던 측면이 있었다. 2015년 1월 김재원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세금 도둑' 발언과 '케이크값'으로 과대 포장된 공무원복지 수당 등에서 대치가 발생하기도 하고, 조사관들의 인적 구성, 위원들의 발언, 워크숍의 형식과 내용 등 눈만 뜨면 새로운 대치선이 발생해 이를 담당하는 조사관은 언제나 '다이내믹'한 감정과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아마 다른 행정부처에도 그 정도 수준의 미세 검증을 한다면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공무원이란 직업도 꼭 좋은 직업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그 사이사이 재빠르게 '자료제출권'을 활용하여 특조위의 약한 고리를 드러내고자 노력했던 여당 의원들의 '속도전'으로 인해 결국 진상규명과 관련한 조사 예산은 절반 이상이 감액되어 버리고 말았다. 절박한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정치의 기능은 적어도 세월호 특조위에서만큼은 작동하지 않은,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였다.
# 오묘한 감정 불러일으킨 이준석 선장의 모습2016년 3월 순천교도소, 이준석 세월호 선장은 참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필자 앞에 앉아 있었다. 검찰의 수사 이후 공식적인 조사는 '세월호 특조위'가 처음이라고 그는 서두에 말을 꺼냈다. 설사 악마와 같은 모습, 뻔뻔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말자 결심했건만, '백발이 성하고 야윈' 매우 초라한 모습과 가족 이야기에서는 눈물을 흘리던 그의 모습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악어의 눈물'이라 판단하기에는 지나치게 코끝이 빨개지고, 난청을 호소할 때는 흡사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뭐랄까 가족을 제외한 모든 것을 체념한 그의 모습에서 감정의 중심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역력하다. 적어도 이준석 선장의 눈물의 의미만큼은 해석하지 않고 앞으로도 여운으로 남기고 싶다.
# 특조위 조사관들, 모두 '자로'와 같은 마음
2016년 12월 25일 단원고 아이들에게 준비할 선물로 '세월X'를 제작했던 자로의 등장은 혹시나 잊고 지냈던 진상규명의 의지를 불태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중에서도 해군레이더를 지목해 진상규명의 단초가 있을 것이라 본 것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많이 연구한 끝에 내린 판단이라는 점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진상이 애초 누군가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닌 까닭이다.
다만 필자가 2016년 2월 KNTDS(해군전략전술체계)를 조사하기 위해 접촉한 많은 해군 관계자들 역시 '군사적인 제약'을 제외한다면 한결같이 그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최대의 조사 편의를 봐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과 결국은 KNTDS를 열람케 하여 기초 정보를 확인하게 했던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한다면 KNTDS 공개는 필요한 사안이지만 공개하지 않는다 하여 과녁이 지나치게 해군 전체로 확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또한 위원회는 그 조사의 1차적 결과물을 제시한 바 있어 집단지성에 활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국민들 수만 명이 동조단식을 했을 수도...
2016년 10월 5일 광화문 광장, 세월호 특조위가 단식 농성에 돌입한 지 71일째, 1944명이 참여한 시민 동조 단식이 66일째를 마지막으로 특조위는 광화문 농성장을 철거했다.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엄연한 해석 차이가 존재함에도 6월 31일자로 끝내 행정집행을 서둘러 한 야속한 박근혜 정부였다. 10월, 11월 안에 세월호 인양이 가시화된 상황이라 정말 끝까지 설마했던 하루하루였지만 정부는 좀체 움직이질 않았다. 사실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것은 누구나 조심스러워했지만 자연히 '세월호 7시간'이 생각나기 마련이었다.
천막을 철거한 지 두 달 남짓이 지났을까. 12월의 찬란한 촛불시위, 수십만 시민들의 손에는 "세월호 특조위 부활", "7시간 조사" 피켓이 들려 있었다. 권력의 지형이 변화하는 순간, 정제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가 그대로 광장에 울려퍼진 것이다. 특조위 조사관들 사이의 넋두리지만, 만약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 특조위의 단식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더라면, 한국의 현대사 속에는 '수만 명의 동조단식' 장면이 쓰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온전한 진상규명과 미수습자가 전원 수습되는 2017년 되길
비록 특조위는 사라졌지만 2017년 1월 7일 '416세월호참사국민조사위원회'가 출범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힘 있는 발걸음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이 흐름은 인양 국면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 판단한다. 또한 지금도 동거차도의 천막에서는 인양의 그날까지 하루하루를 모니터링하는 유가족들이 엄연히 계신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여론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끝난 건 하나도 없다.
무언가 들썩들썩, 왁자지껄 지나갔지만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고창석,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아홉 분은 여전히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고, 저 못난 배는 아직도 자기가 왜 넘어졌는지를 얘기해주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 1000일, 해내야 할 일은 아직도 명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