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납월 홍매 피거든 문자 주세요."
순천 금전산 금둔사 주지이신 지허 스님께 청을 넣었습니다. 매화꽃을 매개로 스님 뵙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면 자연스레 법문과 녹차가 따라오니까. 스님, 고요했습니다. 그래 설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납월 홍매가 피었을까?'
생각이 머물자 봄의 전령 매화꽃이 보고 싶었습니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금둔사 납월(음력 12월) 홍매는 여섯 그루로, 양력 1월 말부터 3월까지 꽃을 피웁니다. 지금이 1월이니 벌써 핀 홍매를 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밖에도 금둔사에는 청매, 설매, 홍매 등 우리나라 토종 매화 100여 그루가 있지요.
꽃으로 피어날 순간의 기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금둔사로 향하면서 꽃에 대한 집착을 버렸습니다. 납월 홍매, 피었으면 핀대로, 피지 않았다면 꽃망울인 채로 즐기면 될 것이기에. 또한 매화 꽃망울을 보면서, 어느 한 순간 꽃망울을 톡 터트리고 꽃으로 피어날 순간의 기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쾌, 통쾌, 상쾌할 수 있으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마냥 행복했습니다.
전남 순천 금전산 금둔사. 일주문에 들어섰습니다. 선계로 들어선 기분이랄까. 대웅전을 돌아 납월 홍매를 찾았습니다. 애석하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만난 홍매는 꽃망울인 채였습니다. 마음 한쪽에선 꽃을 기대했던 걸까, 실망스러웠습니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오건만, 너무 일찍 봄을 그리워했나 봅니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건, 활짝 핀 홍매 한 두 송이를 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금둔사가 소개하는 <납월매> 시 한 수 읊지요.
납월매
신라 시인 최광유
찬 서리 고운자태 사방을 비춰
뜰 가 앞선 봄을 섣달에 차지했네
바쁜 가지 엷게 꾸며 반절이나 숙였는데
개인 눈발 처음 녹아 눈물어려 새로워라
그림자 추워서 금샘에 빠진 해 가리우고
찬 향기 가벼워 먼지 낀 흰 창문 닫는구나
내 고향 개울가 둘러선 나무는
서쪽으로 먼 길 떠난 이 사람 기다릴까
간절함이 통했을까, 여섯 번째 납월 홍매 기적을...
"여기 납월 홍매가 활짝 피었어요."
금둔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대웅전으로 향하던 중, 종무소 앞마루에 앉아 있던 처사님 말씀에 귀를 의심했습니다. 활짝 핀 매화꽃을 포기하고 꽃망울에 만족했던 터라, 제 반응이 별로였나 봅니다. 무시하고 대웅전으로 발걸음을 몇 걸음 뗌과 동시에 처사님 목소리가 귀를 때렸습니다.
"홍매 사진 찍으러 오시지 않았어요? 저기에서 활짝 핀 홍매를 볼 수 있어요."
말이 뒤통수에 부딪쳐 떨어지기도 전, 발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그는 배움을 위해 삶 여행길에 나선 선재동자를 돌려 세운, 납월 홍매의 대가였던 셈입니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었습니다.
"아~~~!"
마음 속 깊숙이 자리했던 간절한 바람이 통했을까. 거기엔 매화꽃이 꽃송이로 피어있었습니다. 지금 막, 꽃망울을 터트리고 꽃으로 태어나는 순간의 최고 절정처럼, 꽉 다문 입 사이로 한순간 탄성이 터졌습니다. 한 그루에 야단법석으로 활짝 핀 납월 홍매. 햇볕이 바로 드는 곳에 자리한 여섯 번째 납월 홍매가 기적을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지허 스님을 찾았습니다.
납월 홍매, 겨울의 한 가운데서 생명을 잉태하고
"겨울의 앙상한 나무 이전에는 뭐였지?"
"단풍."
"단풍 전에는?"
"나무 한가득 우거진 '녹음'."
"녹음 전에는?"
"잎."
"잎 전에는?"
"'움' 혹은 '싹'."
"이게 다 나무야. 결국은 하나. 납월 홍매의 본질은 인간인 우리보다 백배 천배 만배 더 훌륭해. 조금만 추워도 엄살 인간. 추운 겨울에 핀 붉은 꽃, 이게 바로 부처님의 정신이야. 마음 닦는 일에 온 힘 다해."
납월 홍매. 겨울의 한 가운데서 수많은 생명을 아름답게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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