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으로 올해 대선은 한층 뜨거워졌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5년간 국가원수가 될 대통령 후보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세인들의 관심은 최후의 승자가 될 후보를 중심으로 한 '영웅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예부터 전해 내려온 영웅서사의 일반적인 패턴을 처음으로 정리해서 이론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미국 신화학자 조셉 캠벨(1904~1987)이다.
1949년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출생의 비밀이나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어느 순간 자신의 비범함을 발견하고, 그의 가치를 알아본 동료(참모, 책사)들의 도움을 받아 일생일대의 모험에 나서 시련을 딛고 성공한다"는 영웅서사의 전형을 제시했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TV드라마와 영화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아주 낯익은 패턴이다. 미디어는 대중이 이런 식의 '영웅드라마'에 열광한다는 것을 오래전에 간파했고, 대중도 이 단순한 영웅서사의 변주곡들을 즐기는 데 익숙해진 결과다.
그런데 영웅서사는 정치 저널리즘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선거 때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대선 드라마는 한마디로 "대통령 후보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선되는 과정"으로 압축된다.
1987년 5년 단임제 대통령제가 시행된 후, 박근혜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은 50% 미만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당선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답변이 '영웅서사'다.
한마디로, 대통령 당선자에게는 남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특출함'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1992년 당선자 김영삼은 정치인생 내내 박정희·전두환이라는 외부의 적과 김대중이라는 야당 내 라이벌의 도전을 함께 받았다. 그는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1990년 3당합당을 강행했고, 여당내 소수파라는 한계를 뚫고 2년여 만에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해 대선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왔다"는 그의 언명을 유권자들이 납득하는 과정이었다(그가 임기 초반 보여준 개혁 드라이브는 인간에 대한 호오를 떠나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1997년 김대중의 당선은 "한 번 여당이면 영원히 여당"이라는 신화를 붕괴시킨 사건이었다. 2위 이회창과 역대 최저격차(39만 557표)를 기록할 정도의 접전이었다. 호남 출신의 상고 졸업생, 생명을 위협당한 납치, 군사정부의 사형선고, 3전4기의 대권 도전, 정적 김종필과의 연합, 대선 막판 표심을 흔든 IMF 금융위기. '김대중 드라마'에는 담을 얘기가 너무 많다.
참모들 뒤통수 때린 MB, 그에게도 '영웅서사'는 있었다2002년은 지금도 '노무현 드라마'의 해로 꼽힌다. 당내 비주류라는 조직의 열세를 뚫고 그는 국민경선에 힘입어 여당 후보가 됐다. 그러나 연이은 지방선거와 재보선 패배로 그의 위치는 흔들린다. '제3후보' 바람을 일으킨 정몽준에게 후보를 양보하라는 거센 압박 속에서 그는 단일화 게임에서 승리했다. 투표 전날에는 변심한 정몽준의 지지 철회라는 폭탄을 만났지만, 끝내 승리를 지켜냈다. 그해 대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언더독(승부에서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에게 '제2의 노무현'을 꿈꾸게 한다.
지금의 여당이 배출한 두 명의 전·현직 대통령은 어떨까?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캠프는 이명박에게 '자수성가한 기업인으로 변신한 운동권 대학생'의 이미지를 입혔다. 보수·진보와도 모두 통하는 실용주의자이니 믿어보라는 얘기였다(물론, 그는 대통령이 되자 그런 말을 하고다닌 참모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영웅서사는 완성되지 않았다.
당심에서 지고, 민심에서 이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그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대선 막판에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은 BBK 사건으로 검찰에 기소될 위기를 넘겼다. 이러저러한 흠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모두 부자로 만들어주고, '성공시대'로 이끌 CEO형 리더십에 대한 기대감이 그의 영웅서사를 완성했다.
2012년 대선의 승자 박근혜는 '박정희 신화'의 계승자이기도 했다. ▲ 부모 모두가 총에 맞아죽은 불행한 가족사 ▲ 2006년 지방선거 당시의 '커터칼 피습' ▲ 2008년 총선 때 친이명박계의 '공천학살'에도 불구하고 '친박연대'의 약진으로 확인된 위력적인 팬덤 ▲ 이명박정부 내내 보여준 친이계와의 갈등과 대립 등등이 그에게 '남다른' 여당 후보와 대통령의 지위를 안겨줬다.
심지어 '영웅서사'는 패자에게도 있다. 1997년 대통령선거의 차점자 이회창은 세풍, 안풍, 총풍이라는 3대 악재에도 불구하고 지지층을 결집시켜 이듬해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는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는 '책사' 윤여준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회한 정객들을 대거 낙천시킨다. 좌로는 장기표, 우로는 김윤환까지 끌어모은 민주국민당(민국당)의 도전도 한나라당의 원내 1당 등극을 저지하진 못했다. 그에겐 2002년 대선에서 46.6%의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불러 모을 힘이 있었다. 48.9%를 얻은 노무현이 그의 상대였다는 것 빼고는 '승자의 조건'은 완벽해 보였다.
이제는 2017년의 주인공이 될 대선주자들의 얘기를 할 차례다. 편의상 리얼미터가 1월 2주차 전국 2526명(무선 90 : 유선 10 비율)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지지율 순으로 6명만 서술하겠다(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20% 박스권을 벗어나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에겐 '영웅서사'가 있을까?
나는 '있다'고 보는 편이고, 결정적인 전환점을 지난해 20대 총선으로 생각한다. 그는 5년 전 대선에서 48.0%의 엄청난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박근혜에게 패하고 만다. 14년 간 국회의원을 한 박 대통령에 비해 그는 본격적인 정치인 행보를 한 지 1년 남짓 밖에 안됐고 '노무현의 비서실장' 이미지도 강했다("권력의지가 안 보인다"는 비판 아닌 비판은 사실 그의 짧은 정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문재인이 "호남이 지지 거두면 물러나겠다" 하고도 버틸 수 있는 이유문재인은 2015년 2월 "당권에 도전하지 말고 유력 대선주자로 계속 남아달라"는 박지원 의원의 권유를 뿌리치고 박 의원을 누르고 대표에 당선됐다. 그러나 '당대표 1년'은 재보선 패배와 안철수와 호남 의원들의 대거 탈당으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당대표가 된 후 영입한 김병관·김병기·김정우·박주민·손혜원·조응천·표창원 등이 수도권 총선에서 너끈히 당선됐다. 비록 호남에서는 참패(3석)했지만, 비호남 지역(107석)에서는 2004년 열린우리당의 성적(104석)을 넘어서는 승리를 만끽했다.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압승하고 비례대표 득표율에서도 민주당을 1.2% 포인트 앞서는 파란을 연출했지만, 소선거구제에서 총선 승패를 가르는 '지역구 표심'은 거의 모두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는 방향으로 쏠렸다. 문재인이 "총선에서 호남이 지지를 거두면 정치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을 하고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비호남권의 야당 지지층이 호남과 '다른 선택'을 한 결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총선 이후에도 민주당 내에서 잦아들지 않는 친문 패권주의 논란도 지난해 '위기의 문재인'을 지키려고 했고 '10만 당원'으로 모습을 드러낸, 어마어마한 숫자의 지지자들을 떼놓으면 주변부만 빙빙 돌게 된다. 그들 중 일부가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지지그룹 전체의 이미지로 등치시키는 것도 패권주의 논란에서 솔직한 태도는 아니다('정치인 팬덤' 얘기는 나중에 보다 상세히 다루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2016년 총선을 계기로 문 전 대표에게는 자신만의 승리 드라마를 써내려갈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졌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건'이다. 드라마 최종회까지 아직 중반도 안 지난 느낌이다.
문재인과 양강 구도를 이루거나 그를 맹추격하는 2위에 있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가장 큰 숙제가 바로 이 '영웅서사'다.
명문 충주고와 서울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출신에 1970년 외무고시 합격한 이래 청와대 수석과 외교장관 등 거의 모든 정부 요직을 맡아본 경력, '한국 외교사에서 개인이 거둔 최대 승리'로 평가받는 유엔 사무총장 당선까지 한국 외교관으로서 그는 오를 수 있는 곳에는 다 올랐다.
'외교관 출신 대통령'이 그의 마지막 소명이 될 수도 있겠다(어떤 의미에서 그는 1981년까지 유엔 사무총장 10년 임기를 마친 뒤 1986년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된 쿠르트 발트하임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발트하임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 직전인 1971년 대선에서 47.2% 득표로 아깝게 낙선된 '직업 정치인'이었다. 1986년 대선은 그의 두 번째 도전이었다).
반 전 총장의 인생에서 유권자들을 매료시킬 드라마는 뭐가 있을까? 그런데 반기문 측 사람도 "우리도 찾아보는 중"이라고 할 정도로 알려진 얘기가 별로 없다.
김대중정부의 외교부 차관이었던 2001년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 사건으로 경질됐다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보좌관으로 재기한 일, 이듬해 6월 이라크 김선일 피살 사건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으로 선 일 등등이 언뜻 떠오르지만, "무슨 일 있었냐"고 되묻거나 그 정도로 성에 안 찬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제야말로 그가 자신의 드라마를 써낼 시점이 아닌가 싶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상 그는 관료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혹독한 검증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후보 검증의 시험대가 '반기문 드라마'의 무대가 되는 셈이다.
탄핵 국면에서 3위로 깜짝 부상한 이재명 성남시장의 힘은 분노와 쾌활함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치르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한 행적, 시원시원한 언변을 놓고 '제2의 노무현'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꽤 많다.
'변방의 사또' 이재명이 넘어야 할 산은...스스로를 '변방의 사또'라고 칭하는 그는 탄핵 정국 전에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자신을 알리는 전략으로 언론에 자신을 부지런히 세일즈했고, 언론이 찾지 않더라도 SNS 글로 화제를 만들어내는 순발력을 보였다.
한때 문재인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그의 지지율은 지금 조정 국면에 있다. 영웅서사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려면 역시 넘어야 할 산은 문재인이다.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이 이인제를 눌렀던 승인을 복기해보면, 노무현의 '새로움'만큼 이인제의 '진부함'이 대비된 측면이 많았다. '이재명 드라마'의 시청률이 반등하려면 문재인 쪽에서 뭔가 큰 사고를 쳐야할 것같은 느낌이 든다.
2016년은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에게 기회와 시련을 함께 안긴 해였다. 국민의당을 만들어 양당구도를 흔들고, 당의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로 올라섰다. 총선 직후만 해도 호남 민심을 기반으로 안 의원이 문재인과 양강 구도를 이룰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안철수가 2017 대선전의 최종승자가 되더라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전과'는 올렸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반기문의 등장과 함께 안철수가 독점했던 '새정치' 시장은 경쟁 체제가 되어버렸다. '김수민·박선숙 의원 리베이트 의혹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국민의당이 1심 무죄 판결과 전당대회 이후 반등의 기회를 잡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안철수 지지율이 조금 떨어지자 다른 대안을 찾으려는 일부 호남권 의원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호남에만 갇혀있는 국민의당 지지율을 확장시킬 묘수가 있다면 '문재인 대 안철수'도 허황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남대전고 1학년 때 '광주 5.18'의 의미를 깨닫고 혁명을 꿈꾸다가 중앙정보부 대전지부에 끌려가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제적당한 경험이 있다. 대학 시절 '애국학생회', '반미청년회' 같은 지하서클 활동으로 연거푸 수감됐고, 2004년 노무현 대선자금 사건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는 생전 노무현의 '젊은 동업자'였다. 그가 처음 선출직 공직자에 당선된 2010년 지방선거 때는 '노무현 1주기 추모 열풍'의 덕을 본 측면도 크다.
안희정 영웅서사의 전개도 '문재인'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둘의 이미지는 상당부분 겹쳐있다. 안희정 드라마가 재미있으려면, 상대적으로 "문재인 드라마가 재미없다"는 악평이 쏟아져야하는데 '안희정도 (문재인만큼)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듯하다. '차차기' 소리가 듣기 싫다면, 안 지사가 좀 더 고민해야할 대목이다.
지난 한 주 야당 사람들과 가장 많이 주고받은 질문이 '박원순 드라마가 시청률이 오를 것 같냐'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문재인 = 기득권 세력, 청산대상' 발언의 파장 때문인데, 측근들은 "호남권에서 반응이 조금 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반유신 시위로 인한 서울대 제적, 인권변호사 활동, 참여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의 활약, 2011년 서울시장으로 변신까지의 궤적은 나무랄 데가 없다. 반대로, 2014년 서울시장 재선 이후에는 '박원순 재미없다'는 말이 많이 들렸다.
친문재인 성향의 한 민주당 의원은 "1년 전 민주당이 분당으로 휘청휘청할 때 박 시장이 국회의원이었다면 어떤 정치력을 보여줬을 것 같냐"고 묻기도 했다. 박 시장은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었겠지만, 버스(총선)는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버스(대선후보 경선), 다다음 버스(서울시장 3선)는 탈 수 있을지 지켜보는 사람이 아직은 많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차기 대통령의 '영웅서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온 '영웅서사'의 시놉시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중의 상상력으로 얼마든지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보태거나 채울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의 정치판이었다(5년 전 승자였던 박근혜의 몰락을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와신상담의 패자들과 떠오르는 신예들 그리고 '기시감'을 주는 정치권 외곽 인사들 중에서 마지막 순간에 웃을 '영웅'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