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는 한국에 온 지 1년 10개월째인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다. 그는 지금처럼 추운 겨울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추워도 영상 4~5도였던 방글라데시에 비해 영하까지 내려가는 기온도 문제지만, 그는 지금 마음마저 시린 겨울을 맞고 있다. 작년 시월부터 월급을 한 푼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임금체불만 벌써 두 번째 회사다.
그는 지금 회사에서 임금체불을 당하기 전에도 두 달 월급을 못 받고 회사를 옮긴 경험이 있다. 간판을 만들고 설치하는 제주도에 있던 회사였다. 그곳에서 매일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다섯 달을 일했다. 처음 석 달은 월급의 반을 받았다. 수습이라 그러려니 했었는데, 나머지 두 달은 전혀 받지 못했다.
결국, 고용노동부 고용복지센터 알선으로 회사를 옮겼다. 사장은 '형편이 나아지면 보내 줄게'라고 밀린 월급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아티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줄 생각이었으면 아르바이트하는 한국인들에게 월급 줄 때 자신에게도 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옮긴 아티는 다신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두 번째 회사는 용인에 있는 가구 회사였다. 회사에는 방글라데시 사람 말고도 파키스탄 사람과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는 서로 말을 잘 섞지 않았다. 그래도 정해진 일만 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문제는 월급이었다. 15일이 월급날이라고 했지만, 아티는 15일에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선배들은 '형편이 어려워지면 월급이 늦게 나오긴 해도 안 주는 경우는 없다'며 안심시켜 주었다.
방글라데시 선배 중 한 명은 4년 10개월을 일하고 작년 말에 귀국했다. 그는 귀국할 때 한 달 월급과 퇴직금 일부를 못 받았다고 귀띔하고 떠났다. 그가 귀국한 후에 두 명의 방글라데시인이 새로 들어왔다. 다른 한 명은 4년 10개월 근무한 후에 사장이 다시 불러서 재입국한 사람이다. 그는 7년 넘게 사장의 신임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선배들이 경험한 것처럼 1년 동안은 두 달 넘게 밀리는 경우가 없어서 큰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 후반기부터 회사를 그만두는 한국인들이 생기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월급 밀리는 날이 점점 길어졌다. 사실 가장 오래 일했던 방글라데시 선배도 3개월 정도 회사를 그만뒀다가 사장이 불러서 돌아왔다. 다시 들어온 선배는 아티는 물론이고 다른 방글라데시 후배들과도 별로 친하지 않았다. 사장이 그를 특별히 챙긴다는 것을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
월급날이 일정하지 않은 것 말고는 크게 불만도, 불안할 것도 없던 회사는 지난 시월부터 월급을 아예 안 주기 시작했다. 32살이라는 젊은 사장은 '형편이 어려워서'라는 말 밖에는, 언제 줄 수 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월급을 못 받는 동안 아티가 회사에서 받은 돈이라고는 식비 5만 원이 전부였다. 삼시 세끼를 스스로 해 먹어야 하는 회사에서 처음 약속했던 식비는 20만 원이었다. 그래도 식사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같이해 먹기 때문에 석 달을 견딜 수 있었다. 7년 가까이 된 선배는 사장이 얼마는 준 눈치였지만, 월급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석 달 임금체불에 부당해고까지 당해도, 마냥 기다리라는 고용센터월급을 못 받아서 송금을 못 할 때 고향에서 아버지가 아프다는 연락이 왔다. 아티는 친구들에게 삼백만 원을 빌려 송금했다. 덕택에 지금 수중엔 한 푼도 없다. 석 달 넘게 월급을 못 받은 아티는 새해가 되면서 사장에게 밀린 월급을 요구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욕설뿐이었다.
"뭐 달라고? 안 준다고! 왜 자꾸 물어! 돈 없어 새끼야. 가! 가! 시끄러워 빨리 가!""사장님, 돈 없어요. 언제 줘요.""더 이상 할 얘기 없잖아. 그만하는 걸로 하자." 아티는 도움을 청해 보려고 고용노동부 고용복지센터를 방문했다. 고용센터는 "임금체불은 우리 관할이 아니다. 노동청에 진정해라"며 안내해 줬다. 고용센터의 말에 따라 노동청에 진정한 사실을 안 사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너 신고했지. 병원 간다고 나간 놈이 진정을 해?""병원도 갔다 왔어요.""진정 놓은 거 혜택 받으려면 그만 둘 각오는 하고 한 거 아냐. 그래, 노동부에서 보자. 그러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 니가 일 안할 생각으로 그럴 거라고 난 상상도 못했어. 어차피 사람 없는 거, 한 사람 없어도 돼. 나가!" 사장은 아티에게 회사에서 일하지도 말고, 기숙사에서도 나가라고 요구했다. 아티는 어쩔 수 없이 고용센터를 다시 찾아가서 사업장 변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고용센터는 "노동청에서 임금체불 사실 확인원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주노동자가 석 달 넘게 임금체불을 당하고, 부당 해고를 당해도 사장이 계약 해지 사실을 알려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며 아티에게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고용센터는 사장이 임금 체불 사실을 입으로 시인했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임금체불이 석 달 이상 될 경우에는 고용센터 직권으로 고용해지를 하고, 해당 업체는 외국인 고용제한 업체로 지정하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고용센터 담당자는 "오랫동안 외국인 고용한 업체라 그 회사를 잘 안다. 사장님에게 경영상 이유로 해고한 걸로 해서 서류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며 사 측의 입장만 대변했다.
밀린 월급 달라고 했다가 쫓겨난 아티는 요즘 기숙사에서 잠만 자고 아침 일찍 회사를 나온다. 사장에게 들키면 혼나기 때문이다. 몰래 재워 주는 선배와 한국에 온 지 두 달 조금 넘은 후배들에게도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조만간 이주노동자 쉼터를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다.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러 갔다가 퇴짜를 맞았던 날은 낮에도 영하 날씨였다. 그 날 아티는 점심도 못 먹은 상태에서 이주노동자쉼 터를 찾았다. 쉼터에서 구워 준 팬 케이크를 먹으며 아티는 방글라데시에서 먹던 로띠를 떠올렸다. 카레를 찍어 먹는 밀가루 빵이지만, 언제나 달콤하게 혀끝을 간질이던 로띠 맛이 팬 케이크에서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