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밥상머리' 여론이 활발하게 조성되는 설 연휴. 올해 설은 국민들에게 좀 더 특별히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 조기대선 정국 때문이 아니다.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 덕택이다. 연휴 직전이던 지난 25일, 국민들에게 "오붓한 분위기에서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라는 '딴나라'식의 끝인사와 함께 투척한 1시간짜리 인터뷰 영상으로 인해 자괴감을 느꼈을 국민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조상님들 제사에, 부엌일에, 아이들 돌보고, 세뱃돈까지 챙겨야 하는 설 연휴. '빨간날'이어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소위 '폭탄'을 투척한 박 대통령은 설연휴 첫날이던 27일 하루, 그토록 좋아해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던 '관저'에서 특검 조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다. 덕분에 특검팀도,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휴일을 반납한 채 '열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국민들을 피곤케 하는 대통령 맞다.
그래서 이 설 연휴에, 박 대통령도, 국민들도 한 편쯤 챙겨봤으면 하는 영화들을 추천하려 한다. 세 편 모두 이 탄핵정국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후폭풍을 곱씹으며 한국사회의 현재를 음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연휴 동안 머리를 식히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행여 대통령이나 일부 국민들은 전투력(?)을 상승시킬 작품들을 찾지 않겠는가. 이게 다 조상님, 아니 대통령과 그의 공범들 덕택 되겠다.
<프로스트 VS 닉슨>, 닉슨보다 못했던 '박근혜 인터뷰'
"대통령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박 대통령의 인터뷰 발언이 아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당한 리처드 닉슨의 일성이다. 물론 우리의 대통령은 '정규재 TV'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탄핵 정국과 관련 "여성이 아니면 그런 비하를 받을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여성 비하라고 생각한다"와 같이 닉슨에 버금가는 주옥같은(?) 어록을 남겼다. 종종 미 트럼프 대통령과 비교 당하는 박 대통령의 발언은 실로 처참한 수준이었다는 중평이다.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2008)은 저 닉슨의 일성이 담긴 실화영화다. 흥미롭게도, '대통령의 인터뷰'를 조명한 작품이고, 그 대통령은 사임 이후의 닉슨이다. 적당히 속물에다 한물간 토크쇼 MC인 프로스트(마이클 쉰 분)는 거물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기를 꿈 꾸고, 닉슨(프랭크 앙겔라 분) 역시 정치인과 인터뷰가 전무했던 이 진행자와의 방송국 인터뷰를 통해 정치계로 복귀하고 싶어 한다. 동상이몽 맞다. 그러나 4일 간의 인터뷰 기간 동안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꼬장꼬장하고 노회한 닉슨과 정치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퇴물 방송인 프로스트. 영화는 인터뷰 내내 '대통령급'의 중후한 화법을 구사하며 프로스트를 압도하는 닉슨의 모습을 가감없이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스트 역시 '미국인'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미국 최대의 스캔들을 모른 채 할 수도, 파헤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긴 이 '언론인' 프로스트는 닉슨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인다. 닉슨은 이 인터뷰가 방송을 탄 뒤 결국 재기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흥미진진하다. 1980년대부터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론 하워드 감독이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 과정과 인터뷰 순간에 집중한 연출도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는 참담한 현실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아직 탄핵을 당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인터뷰를 역사에 남겼다. 더불어 정규재라는 언론인 역시 기자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내려 놓은 인터뷰였다.
반면 영화 속 닉슨은 변명이라 느껴질지라도 확고한 자기 논리가 있었다. 최소한의 현실인식은 갖췄다. 반면 박 대통령은 어떠했나. 그 논리를 깰 인터뷰어도, 명확한 현실 인식도 없었다. '거짓말'로 일관했다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결국 탄핵정국 초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닉슨의 워터게이트와 자주 비교됐지만, 이 <프로스트 VS 닉슨>과 박 대통령의 '정규재 TV'와의 인터뷰만 놓고 보자면 닉슨의 압승 되겠다. 30여년 전에 사망한 닉슨보다 못한 화법과 논리를 구사하는 '피의자 박근혜', 예나 지금이나 참 부끄러운 대통령이다.
<트럼보>, 박 대통령은 절대 모를 블랙리스트의 고통
'정규재 tv'와의 인터뷰에서도 박 대통령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진짜 알지 못하는 사실은 블랙리스트의 존재 자체가 그 얼마나 잔인무도한가 하는 점일 것이다. 지난해 개봉한 <트럼보>(2015)는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횡포하던 시절, 이 블랙리스트가 창작자의 영혼은 물론 생활까지 처절하게 갉아먹었던 현실을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톤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좌파'라는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그로 인해 1년 간 투옥되고, 그 이후에도 일감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계를 위해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쓸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위해 무려 11개나 썼다. <스파르타쿠스>도 그 중 한 작품이다. 트럼보가 가짜 이름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로마의 휴일>이었다.
40년 뒤, 그는 본명으로 아카데미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한다. <트럼보>의 명장면이다. 그 무대에서 트럼보는 "악마의 시절에 각자 처한 상황은 악마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며 "우리 모두가 희생자"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그건 희생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관용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그는 옥고를 치러야 했고, 친구를 잃어야 했다. 궁핍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창작의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겼었다. <트럼보>는 그게 '표현의 자유'의 억압이고, 매카시즘이란 광기의 폐해임을 분명히 한다.
박 대통령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박 대통령에게 예술이란, 대중문화란, 창작이란 그저 '딴따라'들의 행위에 다름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계를 유신 시절로 되돌린 블랙리스트가 횡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부터 '퍼스트 레이디'로 살았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활했던 박 대통령이 "밥줄이 끊긴다"는 상황을 이해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해외 'K-POP' 공연에 아이돌 그룹 등을 초청하는 것을 그토록 즐겼다고 한다. 반면 <그때 그 사람들>이나 <변호인>과 같은 특정 영화는 그리도 싫어했다고 한다. 과연 박 대통령에게 '예술'을, '예술가'들의, 창작자들의 입장을 공감할 여력이 있었을까. 단순히 의전의, 통치 행위의 일환이지 않았을까. 또 정확히는 모르겠다. 한국 드라마는 그토록 즐기셨다고 하니. 박 대통령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최근 종영한 <도깨비>는 보셨을까 궁금해지는 설 연휴다.
<그때 그 사람들>, 다시 봐도 '박정희 암살'이 불경하다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최근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논란을 조명하면서 다시 '김재규'를 거론했다. 암살자 김재규, 아니, 제8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 또 유신 시절 건설부 장관이자 국회의원을 지냈던 그 김재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지난 연말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와 현재를 파헤치면서 꾸준히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을 재조명했다.
그래서 임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을 2017년에 다시 보는 일은 특별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전후 얼마간을 담은 이 작품에 암살 장면이 정면으로 담겨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데도 2005년 개봉 당시, 박지만 씨는 이 영화를 명예훼손을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당시 관객들은 실제 뉴스 화면은 볼 수 없었고, 제작사 명필름의 항소 끝에 3년 만에 '완전판'을 볼 수 있게 됐다. 사실 이 영화에서 '김재규의 활약' 큰 의미가 없다.
임상수 감독은 현재적인 시선에서 마치 '낄낄대는' 톤으로 당시 암살 전후 벌어진 권력 놀음을 마음껏 조롱했다. 임 감독은 '젊은 여성을 옆에 끼고 시바스리갈을 마시다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당시 '팩트'에 상상력을 더했고, 더불어 그 절대권력 앞에서 쩔쩔맸던 당시 정치인들, 권력자들을 꼭두각시나 허수아비처럼 그렸다. 10년도 넘은 그 영화 안에, 일반 '국민'의 목소리는 희미하지만 그 국민들을 농락했던 권력자들의 더러운 맨얼굴만큼은 무척이나 생생했다.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의 존재와 박 대통령과 최태민의 관계가 까발려진 지금, <그때 그 사람들>은 좀 더 확대된 의미망을 던져준다. 2005년 당시 <그때 그 사람들>을 불경하다고, 좌파 지식인의 지극한 냉소라고 치부했던 이들은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태민과 박 대통령과의 오래된 인연과 그의 딸인 최순실이 마음껏 유린한 이 나라의 현재상은 <그때 그 사람들> 속 블랙코미디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닐까.
박 대통령에게 이 작품을 다시 보라고 권하지는 못하겠다. 누구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은 지극한 비극이고, 또 누구에게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였으니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때 그 사람들> 속 블랙코미디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지극한 비극이란 사실일 것이다. '박정희 체제'도, 박근혜 통령의 헌정유린을 하루 빨리 중단시켜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설 연휴, '밥상머리' 논쟁의 다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거취 문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