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회의 입법 권한을 무시한 채 행정명령에 기댄 정치를 하고 있어서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전임 대통령들이 재임기간 중 평균 10일에 한 개 정도의 행정명령을 내린 데 비해, 트럼프는 지난 20일 취임 후 하루 한 개꼴로 행정명령 (Executive Order와 Presidential Memoranda)을 내리고 있다. 현재 서명을 앞둔 초안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이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행정명령의 수효뿐만 아니라 위헌논란과 미국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우려를 낳고 있다.
현재 공화당이 상하원 모두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를 통해 정책을 법제화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의 논의를 무시한 채 행정명령으로 국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데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반이민 행정명령을 내리는 과정에서 국무부, 국토안보부, 연방이민국(USCIS), 세관국경보호국(CBP) 등 행정부 내 각 부처와의 협의 과정도 없이 독단적으로 추진했다고 CNN과 <뉴욕타임스>는 비판했다.
큰 파장과 혼란 불러 온 '반이민 행정명령'트럼프의 행정명령 중 특히 반이민 행정명령은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 큰 파장과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멕시코 국경에 벽을 건설하고, 이른바 '이민자 보호 도시(sanctuary city)'들에 대한 단속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지난 27일에는 테러리스트의 미국 입국을 막겠다며 무슬림 7개국 출신의 입국을 제한한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미국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영주권자를 포함하느냐 마느냐로 행정부 내에서도 혼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 도시의 국제공항에서는 이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졌으며 각 지방법원에는 이에 불복하는 가처분신청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또 다른 반이민 행정명령을 준비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가 공개한 두 개의 행정명령 초안 중 '이민법 납세자 보호를 위한 이민법 강화 행정명령'은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이 최근 5년간 미국 정부의 공적 부조의 혜택을 받은 것이 밝혀질 경우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저소득층을 위한 여러 가지 연방 정부 프로그램은 주에 따라 시민권자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이로 인한 충격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외국인 노동자 비자 프로그램 강화를 통한 미국 일자리·노동자 보호 행정명령' 초안은 외국 출신 취업자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고 비자 체계 개편을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문직 취업비자인 H-1B를 비롯하여, 주재원 비자인 L-1, 투자 비자인 E-2, 교류 비자인 J-1, 미국 교육기관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실무연수를 위한 OPT 등 다양한 비자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외국 출신 취업자에 많이 기대온 IT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평가된다. 구글 아마존 익스피디아 등 IT 업체들은 벌써부터 반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잇따른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으로 미국 내 한인사회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민자연구센터 (CMS)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미국 내 서류 미비자는 1천 1백만으로, 이중 한인은 17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중 많은 수의 한인 서류 미비자는 캘리포니아, 특히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서 5만 4천 명 정도의 서류 미비 한인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 약 7천여 명의 청소년은 오바마 행정부의 추방유예 프로그램 (DACA)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반이민정책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한인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 우려'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 협의회' (NAKASEC) 윤대중 사무국장은 각종 행정명령 이후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고 전한다. 특히 추방유예 프로그램 대상자의 경우 이미 연방정부에 개인정보를 다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우려가 극심하다. 상담을 위한 핫라인을 개설하고 추방유예 대상자를 중심으로 워크숍을 열고 있으나 당장 뚜렷한 대응책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정책이 서류 미비자 추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합법적인 이민자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윤 사무국장은 "연이은 행정명령은 소수계 커뮤니티에 대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이며, 다양성과 투명성에 바탕을 둔 미국 민주주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민 노동자 권익보호단체인 '한인타운노동연대(KIWA)'의 강두형 간사도 최근 한인과 남미계 회원의 우려 섞인 문의가 많다고 전하면서 논란이 많은 행정명령을 의회를 무시한 채 강행하는 정치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전문직 취업비자 제도의 변화에 따른 한인의 취업이 어려워져서 한인사회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과 더불어, 남미계 서류 미비자에 대한 추방이 가시화되면 저임금 노동력을 구하기 어려워서 로스앤젤레스 의류산업 존재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의류산업체를 운영하는 한인들이 많은 만큼 이 지역 한인 경제도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의류생산업체를 경영하는 한 한인은 "캘리포니아가 다른 주에 비해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법적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한편으로 사업체 운영자에게는 어려움이 많은 상태이며, 이미 많은 의류생산업체들이 네바다나 텍사스로 이동을 고려하고 있다. 남미계 노동자의 수급이 어려워지면 캘리포니아에서 제조업을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미주 한인들이 이민생활정보를 나누는 온라인 커뮤니티 '워킹USA'나 '미씨USA' 게시판은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에 반대와 우려의 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으나, 행정명령에 따른 조치들을 반테러리즘으로 보고 찬성하는 의견도 일부 있었고, 서류 미비자를 혐오하며 추방에 찬성하는 입장도 간혹 눈에 띄었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에도 송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