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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곳은 바로 '거울의 방(La galerie des Glaces)'이다. 총 길이 73m에 달하고,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다.
바람 한 점 없어도 향기로운 꽃가시 돋혀 피어나도 아름다운 꽃혼자 피어 있어도 외롭지 않는세상마냥 즐거움에 피는 꽃장미나는 장미로 태어난 오스칼정열과 화려함 속에서 살다 갈 거야장미 장미는 화사하게 피고장미 장미는 순결하게 지네<베르사유의 장미> 주제곡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은 사치, 허영과 동의어처럼 읽히곤 한다. 아무래도 그 곳에서 살았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리 읽히는 것과 같은 맥락인 듯 싶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아?"라고 말했던 일화로 유명한 그는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위치한 별궁인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에서 거주하면서 파티와 향락을 즐겼다. 화려하고 값비싼 의상과 보석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사치품들을 긁어 모았다. 그에게 쏟아지는 악명과 불명예, 그리고 적개심은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한들 거짓은 아니다.
이처럼 베르사유 궁전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동의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곳의 주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비극적인 그 이름 '오스칼'이다. 서두에서 인용했던 주제곡을 통해 눈치를 챘겠지만,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의 주인공인 그 오스칼이 맞다.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금발,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수에 차 있던 눈빛으로 뭇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오스칼 말이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이케다 리요코의 대표작으로 첫 연재가 1972년이다. '프랑스 혁명' 무렵을 다루면서 실제 인물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상의 인물 오스칼을 통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당시 '말랑말랑'한 로맨스가 주류를 이뤘던 일본 순정만화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순정만화의 기존 독자층인 소녀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로부터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여세를 몰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고, 그 열기는 1993년 바다를 건너 대한민국에도 상륙했다(비디오 출시는 1990년이다).
멋모르던 시절, TV 앞에 앉아 오스칼의 비극적인 삶을 들여다보며 감정이입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무의식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고유명사는 여전히 '오스칼'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실 '파리'를 여행한다는 사실보다 더 믿기지 않았던 순간은 베르사유 궁전과 그 정원을 거닐었을 때였다. 정말이지 '만화' 속에서나 존재했던, 만화 속의 인물들이 거닐었던 장소였으니 말이다. 자, 이제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인 베르사유 궁전을 만나러 가보도록 하자.
베르사유 궁전이 위치한 베르사유(Versailles)는 파리에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간단한 건 RER(고속 교외 철도, Réseau Express Régional) 'C'선을 이용하는 것이다. 파리의 중심부인 생미셸 역에서 약 30분이면 도착하니 이동에 부담도 없고, 역에서 도보로 5~10분 정도면 궁전까지 당도한다. 참고로 에펠탑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면, '샹 드 막스 투르 에펠(Champs de Mars Tour Eiffel)' 역에서 기차를 타면 된다.
종점인 '베르사유 리브 고슈(Versailles Rive Gauche)' 역에서 길을 건너 약 600m 정도만 '직진'하면 웅장하고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 앞에는 여행자들의 든든한 친구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있으니 간단히 요기를 하거나 커피(혹은 음료) 한 잔을 하기에 좋다. '절대 왕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선 '체력'이 필수다. 만약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금강산도 식후경'을 실천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편이 좋다.
입구를 맞닥뜨리는 순간부터 감탄사가 절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입구를 통과한 후에도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모른다. 입구를 통과하면 왼편에 '매표소'가 있다. 비수기였기도 했지만, 아침 일찍 도착한 덕분(궁전의 오픈 시간은 9시다)에 매표소는 매우 한산하다. 이런 걸 생각하면 여행은 역시 비수기에 하는 게 확실히 이득인 것 같다. 사람들에 떠밀릴 일도 없고, 오로지 나의 속도대로 여행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서둘러 일일권(18유로)을 구입한 후 본격적으로 베르사유 궁전 내부로 들어갔다.
베르사유 궁전은 1층과 2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1층은 황태자의 아파트와 루이 15세 공주들의 아파트로 구성돼 있고, 2층은 크게 왕의 아파트와 왕비의 아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궁전의 규모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디테일하면서도 아름다운 장식들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가 자신의 신하인 재무장관 푸케(Nicolas Foucquet)의 '보 르 비콩트(Vaux-le-Vicomte)' 성을 보고, 자존심이 단단히 상해 역사상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이 오죽했겠는가.
풍요의 방, 비너스의 방, 아폴론의 방 등 궁전의 모든 장소가 '하이라이트'라 할 만 하지만, 그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곳은 바로 '거울의 방(La galerie des Glaces)'이다. 총 길이 73m에 달하고,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다. 천장에는 루이 14세의 생애를 담은 그림이 있고,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매혹적이다.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래 머물러 있는 방이다. 또, 창밖으로 궁전의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장관이 따로 없다.
궁전 밖으로 나오면 프랑스식 정원의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Les Jardins)이 펼쳐진다. 815ha에 달하는 넓은 크기는 시야를 압도한다. 앞쪽으로 라톤의 샘과 아폴론의 샘이 이어지고, 그리고 '프티 카날'이라 이름 붙여진 십자형 대운하가 펼쳐진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하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 중에 프랑스의 한 궁전(아마도 베르사유 궁전이 배경이었을 것이다)에서 왕족(과 귀족)들이 숨바꼭질 비슷한 놀이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이지 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조경(造景)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마치 '이 정도는 돼야 조경이지'라며 자랑하듯 보여주는 것 같았다. 루이 14세가 심혈을 기울였던 만큼 압권 중의 압권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펼쳐지는 풍광들에 취해 마냥 걷다보면(믿기지 않겠지만 걸을 수밖에 없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놓이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를 켜고 방향을 잡아 이동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물론 '제대로' 걸어도 워낙 넓기 때문에 이 곳을 모두 둘러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는 게 좋다.
더 깊숙이 이동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과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왕비의 촌락(Hameau de la Reine)까지 다 구경하면 좋겠지만, 그러자면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함께 파이팅 넘치게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중도에 포기했다. 왕비의 촌락을 앞둔 시점에서 나타난 갈림길...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나올 수밖에. 이미 베르사유 궁전의 압도적 크기에 기가 눌러버린 상태였기에 '항복' 선언은 어렵지 않았다.
이곳, 바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4세는 귀족들을 불러 모아 하루가 멀다하고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들을 제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지라도 그 결과는 루이 16세의 시대에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방만하고 나태한 국가,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족들은 프랑스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우리의 오스칼도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곳에 있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여행자'의 한 사람으로 그곳을 거닐었다. 그 웅장함에 감탄을 하면서도 왠지 모를 씁쓸함이 남았다. 지금에야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지만, 마냥 예뻐할 수만은 없는 '역사'를 지닌 곳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