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님. 저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에 사는 20대 취업준비생입니다. 최근 의원님께서 "신림동(대학동) 고시촌, 노량진 고시학원이 실리콘 밸리 같은 창업의 요람이 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공약을 했다는 기사들을 봤습니다.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하지만 비판에 앞서 우선 독자들께 의원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의원님이 보기에 이제 한국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혁신성장을 통해 새로운 성장 엔진을 만들어 내야 할 시점"입니다. 특히 그 동력을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벤처기업에서 찾아야 합니다.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날 수 있는, 마음껏 도전하고 혁신할 수 있는, 사회적 '혁신안전망' 구축이 가장 중요"하죠.
"공정한 룰이 지배"하는 운동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창업비용 문제는 "자신과 가족들의 자산을 담보로 빚을 내는 '융자' 방식에서 벗어나 전문성 있는 투자자들로부터 유한 책임 하에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투자' 중심의 환경을 만들"면 됩니다. 여기까지가 의원님이 정책발표회에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 청년들의 창업이 쉽도록 규제와 투자 부담을 완화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게끔 안전망을 구축하겠다는 거죠. 얼핏 들으면 달콤한 이야기 같습니다.
'K-주커버그'의 실체... 어떻게 창업하란 말 쉽게 하나하지만 저는 (물론 비유겠지만) 고시촌을 실리콘 밸리로 만들자는 의원님의 생각이 황당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청년' 창업론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공약입니다. 여기서 '청년'은 보편적인 차원의 청년이 아니니까요.
의원님은 가난해서 인문계열 대학원 진학하겠다는 꿈을 포기한 저 같은 청년의 눈물은 안 보이시는지요. 현재 말라죽기 직전인 국내 학문 후속 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창업 지원이 아니라, 석박사 학위 취득 기간 동안 보장되는 안정적인 연구비(생활비) 지원입니다.
또한 '청년들이여 창업하라'는 말은 대학 진학률이 70%에 육박하되 정작 학생 대부분이 학문이 아닌 '취업'에 올인하는 현실을 '창업'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 꼭 창업이어야 합니까? 단지 경제 성장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행복과 행복의 수단이 전도된 겁니다. 행복 사회라면 사람들이 다양한 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청년 정책은 월급쟁이, 벤처 사장, 연구원, 예술가 등 다양한 길 중 무엇을 택하든 기본적인 삶의 안정성을 보장받고 비인간적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간 무분별하고 다양성을 은폐하는 청년팔이 정책들이 얼마나 청년 문제 해결을 지연시켜왔습니까.
둘째, 의원님의 '청년 창업' 운운을 창업을 꿈꾸는 일부 젊은이들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관용적인 해석을 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창업은 능력과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업가가 금수저(트럼프) 출신이냐 흙수저(마윈) 출신이냐 같은 지엽적 문제를 떠나, '극소수'의 성공 사례에 집착하는 보수 공약의 한계는 하나같이 '노오력론'의 동어반복이자 유사과학적 신념입니다.
어째서 그러할까요? 노력의 방향이 잘못됐고 근거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청년들이 너도나도 '혁신혁신', '도전도전' 주문을 외쳐대며 창업에 뛰어들기만 하면 자동으로 잡스와 주커버그가 된답니까? 스타트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조금만 잘 돼도 후발주자인 대기업 자본이 물량 공세로 밀어붙여 아이템을 약탈해갑니다.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나서 또 도전하라고요? 그게 노동 착취와 뭐가 다릅니까? 이게 바로 한국식 'K-잡스' 'K-주커버그'의 실체입니다. 실패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성공의 우연성에만 희망을 걸라면 고문이죠.
또한 청년으로서 스스로에게 '팩트 폭력'을 하자면 제가 주커버그가 될 수 없는 건 당장 역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험, 네트워크, 아이디어, 위기관리 능력 등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데 '투자'만 믿고 제로섬 게임, 과다경쟁 게임에 뛰어들란 말씀을 어찌 그리 쉽게 하십니까? 한국은 내수시장이 취약해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하고, 그러면 경쟁은 더 심해집니다. 창업을 해도 남의 밑에 들어가서 역량부터 충분히 성숙시켜서 창업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결국 일자리가 늘어야겠네요. 물론 젊은이들의 창업 중 아주 희박한 대박 사례가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만 믿고 청년들에게 인생 걸라는 건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방식도 아닙니다. 차라리 종교에 가깝지요. "트럼프" "마윈" 운운하신 부분에서 뜨악한 이유입니다.
하루 평균 3천 명이 창업하고 2천 명이 폐업하는 현실에서 벼랑 끝에 몰린 기존 자영업자들과 명예퇴직자들은 또 어떻게 할 겁니까. 이런 과다경쟁 시장에서 창업주 밑에서 나쁜 처우를(저임금, 열정노동) 받으며 일하는 또 다른 청년들은 행복할 것 같습니까? 그런데도 왜 보수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그 '자수성가' 신화를 못 버리는 걸까 의문스럽습니다.
10대들에게 경영자 마인드를? 그럼 시위하는 법도 가르쳐주세요셋째, 유 의원님이 제시하는 '청년 창업' 6가지 세부 공약을 읽어봤습니다. 이중 "초중등 교육과정에 창업 관련 교육 의무교육화", "정책수립과 집행과정에 민간 전문가 주도적으로 참여"라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교육이나 정책 같은 공적 영역에 경영마인드를 주입하고 민간 전문가를 참여시킨 사례를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은 '대학 기업화'의 선봉이었습니다.
대기업 재단이 학교를 인수해 기업가가 학교 이사장을 했었고, 학과 통폐합 계획을 기업 M&A 전문가들에게 맡겼으며, 학생들이 무조건 회계 강의를 듣고, 리더십 강의라는 명목하에 기업적 사고를 주입받았습니다. 교육과정이 보다 '친기업적'으로 변한 거죠. 기업 입장에서는 부려먹기 좋고 자신들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인재가 나올 테니 좋았겠죠?
학생들도 좋아했습니다. 학교 서열 올라가서 취업 잘 될 거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겁니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기간 동안 기업의 사내유보금이 쌓이고 수출 흑자도 났는데 낙수효과도 없고 일자리도 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국 대학들이 취업률 올린답시고 인문, 예체능 학과들을 마구마구 통폐합하며 다양성을 죽이고 있다.'
'이거 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 때쯤, 학생들은 대학의 기업화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자신들의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어 있는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들에서요. 따라서 저는 초중등 교육에 창업 교육을 의무화하고, 정책을 민간 자문가에게 맡기겠다는 유승민 의원님의 말씀이 좀 위험하게 들립니다. 경영자(자본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노동까지도 파악하는 메커니즘을 10대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니까요.
그 메커니즘의 가장 완벽한 실현은 모든 이들을 '경영자'로 만드는 것 아닙니까. 너무 과한 해석이라고요? 의원님의 진심이 정말 자본가만을 위한 세상이 아닌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이라면, 창업 교육 말고도 아이들이 프랑스처럼 노사 협상을 하는 법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질문하고 토론하는 법을 익히게(철학교육) 해주십시오. 또한 독일처럼 노동법, 시위하는 방법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아이들이 '노동자'의 입장에 서볼 테니까요.